정부 고위공무원인 A 씨.
A 씨는 틈날 때마다 자리를 옮길만한 곳을 알아본다. 요즘 들어 부쩍 ‘언제 옷을 벗어야 할까’ 불안하다. ‘차라리 7급에서 시작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는 이제 50대 초반이다.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다. 20년 넘게 일해 전문성도 있다고 자부한다. 등산이나 하며 늙기엔 눈이 너무 높아져 버렸다. 더구나 둘째는 이제 대학생이 된다. 십중팔구 그는 산하기관이나 유관업체로 재취업할 것이다. 세상은 그를 ‘관피아’라고 부른다.
A 씨는 주변에서 만나거나 들은 고위공무원 사례를 조합해 가상으로 구성한 인물이다. 최근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고위공직자가 퇴직 뒤 산하기관에 취업하는 관행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지고 있다. 관료와 마피아를 합성한 ‘관피아’란 신조어도 유행한다. 하지만 틀어막으려는 논의만 활발할 뿐 근본원인을 진단하는 노력은 미흡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산하기관 재취업 문제는 사실 정부에서만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다. 임원승진에 실패한 대기업 간부가 명예퇴직 뒤 협력업체로 자리를 옮기는 건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도 특징이다. 하나같이 계급제 문화가 강력하다. 후배를 위해 선배가 물러나야 한다는 ‘용퇴’ 관행도 있다.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선배에게 생계수단을 보장해주는 것은 결국 조직 전체를 위한 과제가 돼 버린다.
이명박 정권이 여객선 선령 제한을 30년으로 규제 완화한 게 세월호 참사를 키운 원인이 됐다는 게 드러났다. 규제는 더 많은 걸 검토하고, 더 꼼꼼히 들여다보는 걸 전제해야 한다. 여객선 안전관리를 유관 협회에 위탁한 게 문제가 됐는데 그걸 방지하려면 위탁이 아니라 직접 해야 한다. 결국, 공공기관에서 직접, 엄격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3년 2월18일 대구지하철에서 발생해 사망자만 192명이나 난 화재사고를 생각해보자. 대구시는 백서에서 “관련 담당자 대부분이 규정을 무시하거나 안일하게 대처함으로써 대형 사고로 이어졌다”면서 그 원인으로 지하철공사가 행정자치부의 공기업 구조조정 지시에 따라 1999년 자체 교육원을 폐지해 안전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점, 안전관리 전담부서가 별도로 조직돼 있지 않은 점을 들었다. (‘대구지하철 중앙로역 화재사고 백서’, 2005, 474쪽)
공무원을 비롯한 공공부문 확대에 거부감을 갖는 국민여론을 이해 못할바는 아니지만 ‘규제완화라는 암덩어리’를 제거하고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국가를 원한다면 결론을 명확하다. 우리에겐 더 많은 공무원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중요한건 관피아 논란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역할’이 아닐까? 관피아 척결 외치는 와중에 우리는 가뜩이나 부족한 공공부문 확대라는 개혁과제를 놓치는 건 아닐까?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윤태범은 “퇴직 후 취업에 따른 문제만 지적하기에 앞서 왜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지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며 이 문제를 ‘이해충돌’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것을 주문한다. 공직제도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1) 공공부문에 존중과 신분보장을 주고 그 반대급부로 사익추구를 강력히 규제하는 방식과 2) 신분보장도 없고 노동 유연성도 극대화하는 대신 공인으로서 의무를 요구하지 않는 방식”
윤태범이 보기에 최근 논의는 “신분보장을 약화시키면서 동시에 사익추구 금지만 강화하자는 것”이다. 그는 이를 두고 “꿈속에서나 가능한 망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특히 “‘관피아’라는 용어는 “흑백논리에 기반한 언어폭력이자 공무원을 통째로 매도하는 마녀사냥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계수 역시 비슷한 지적을 했다. “고위공무원단과 개방형 임용제도에서 보듯 ‘경영마인드’라는 이름으로 유연화 경향이 뚜렷해지면서 공무원 신분 자체는 갈수록 ‘회사원‘과 비슷해지는 반면 각종 의무는 ‘공직자’ 기준을 요구하는 모순”을 꼬집는다. 그는 “현 제도에서는 줄 세우기와 사익추구를 막을 방법이 없고, 심지어 정치적 중립도 위협받는다”고 지적했다.
관피아라는 담론이 광범위하게 동의를 받는 것은 공직사회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관피아 담론은 그런 면에서 ‘철밥통’ 담론의 최선 버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관피아 담론이 공무원 신분보장 약화와 공공성 약화를 외면하듯, 철밥통 담론 역시 국가 역할을 부정하는 신자유주의 논리를 유포한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철밥통 담론에는 “하는 일 없이”, “정년보장도 되면서”, “임금삭감도 안 하는” 기득권층이라는 비난 혹은 질시를 담고 있다. 민간영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노동조건 악화와 비정규직화 등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이 정규직이고 정년보장까지 받는 공무원을 향해 돌을 던지게 하는 건 아닐까.
철밥통 담론을 구성하는 세 가지 논거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너무 많다. 하는 일 없다는 비판에는 민원처리 비효율이나 시간외수당에서 나타나는 도덕적 해이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모든 공무원이 노동강도가 강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취재 과정에서 만나본 공무원들 상당수는 꽤 많이 일한다. 특히 중앙부처 간부들 중에는 주말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저녁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상당수다. 공무원들이 받는 시간외수당 역시 민간기업과 비교하면 매우 낮게 책정돼 있다.
공무원연금도 비판 대상이다. 장기적으로 공무원연금을 개혁하거나 국민연금과 통합시켜야 한다는 데 찬성하는 편이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대목도 있다. 공무원들은 퇴직금을 받지 않는다. 지금이야 공무원 평균임금이 대기업에 근접하는 수준까지 올라갔지만,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공무원들은 박봉에 시달렸다. 높은 공무원연금보장은 낮은 임금에 대한 반대급부였다.
공무원에게 정년을 보장하고 적절한 신분보장을 하는 건 역사적인 맥락을 따져봐야 한다.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이 신분을 보장하는 직업공무원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 관료제가 형성된 이유는 전문성과 소명의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패방지와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헌법 역시 정치적 중립을 위해 공무원 신분보장을 규정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년보장은 오히려 민간에서 확대해야 할 문제다. 민간기업에서 신분보장이 악화하니까 공무원 너희도 신분보장 받지 말라고 하는 건 ‘자해공갈’이자 ‘바닥을 향한 폭주’일 뿐이다. 상지대 행정학과 교수 최무현은 “계급제에 기반한 직업 공무원 제도는 신분 보장과 정치적 중립, 부패방지를 위한 것”이라면서 “공직에 높은 사회적 가치를 부여하고 정책 일관성이 높으며 단기적인 정파 논리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장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직사회를 비판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도 5월 19일 대국민담화에서 언급했던 “폐쇄성과 무사안일, 전문성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대국민담화에서 대통령은 자기 입으로 “관피아”라는 표현을 세 번이나 사용했다. (자기 부하들을 조직폭력배에 비유하는 것이야말로 유체이탈화법의 최고봉이 아닐까 싶다.)
과연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할 수 있는 문제일까?
최무현에 따르면 계급제 구조에 기초한 직업공무원제도는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어중이 떠중이가 들고 나는 조직으로는 전문적인 역량을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제도를 유지하는 건 역사가 오랜 국가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조선시대 정1품, 종1품 하는 용어가 모두 계급제 공무원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계급제 요소를 가진 국가에서 공직 인사는 순환보직을 기본으로 한다. 직업공무원에게는 직무 전문성보다는 종합행정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급제에선 승진이 중요할 수밖에 없고 조직 사기를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연공서열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이걸 비판하는 사람들은 먼저 겸허하게 자기 주변을 돌아보기 바란다. 민간기업에서 평직원으로 일하는 친구가 계장됐다고 축하 전화를 하지는 않았는지, 거래처 부장이 임원 승진했다고 화분을 보내진 않았는지, 승진했다고 친구들 불러모아 한 턱 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한국 사회 전반에 적용되는 문화인데 왜 공무원들만 욕먹어야 한단 말인가.
경희대 행정학과 교수 강제상는 ‘무사안일’이란 부분에 대해서도 달리 볼 것을 주문한다. 그는 “무사안일하게 보이는 것은 대체로 공무원들이 정책을 입안할 때 최악을 피하는 걸 우선시하기 때문”이라면서 “정책이 국민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게 반드시 비난만 할 일인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공무원은 복지부동이라는 비난을 받지만 따지고 보면 정권이 바뀌었다고 불이익을 주고 시키는 일만 하도록 만든 건 결국 권력자들이었다”고 꼬집었다.
사실 관료제는 무조건 나쁘다는 것도 선입견에 불과하다. 간단하게 전쟁과 군대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근대국가에서 전쟁은 총력전 양상을 띄게 됐다. 전쟁 승리를 위해서는 고도로 숙련된 ‘폐쇄적인’ 곧 응집력 있는 직업군인이 필요하다. 군을 지휘하는 장교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부하들을 지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보급과 전투 병참 통신 등 각종 전문지식을 ‘어느 정도까지는’ 숙지해야 한다. 빠른 의사결정과 신속한 집행을 위해서는 강력한 계급구조도 필요하다.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공을 세운 부대 지휘관과 부대원에게 특진 혹은 포상휴가라는 보상도 적절히 해줘야 한다.
정권 입맛에 따라 공무원 인사가 좌지우지되거나 법이 정한 임기조차 보장해주지 않는 행태는 공무원들에게 복지부동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닐까? 자기 소신을 갖고 일을 하는 공무원들이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소신과 무관하게 맡은 일을 열심히 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받는 사례도 적지 않다. 기초단체에선 단체장 바뀌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홍보팀장을 좌천시킨다는 게 상식처럼 돼 버렸다.
“자기 소신을 갖고 일을 하는 공무원들이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다. 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려는 사업에 커다란 결점이 있어 사업 추진에 소극적으로 나서거나 반대 목소리를 내는 공무원은 승진에서 밀리고 한직으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이러니 어느 공무원이 책임있게 일을 추진하겠느냐.” (오성택 행정부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
“새 정권은 집권 초반부터 공직사회가 가진 역량을 단기간에 끌어올리기 위해 공무원들을 독려한다. 하지만 정권이 교체되면 그전 정권에서 열심히 일한 공무원은 아무래도 집권 세력 눈 밖에 날 수밖에 없다. 열심히 일해도 그다음이 보장이 안 되기 때문에 요즘 말하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정치권의 간섭이 더욱 심해진다면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공무원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교수 김영우)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관피아’를 위한 변명 (하): 공직 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글은 그간 고민과 기사에 담지못한 취재내용을 바탕으로 서울신문에 썼던 여러 기사를 대폭 수정 보완 종합한 결과물이란 점을 밝힙니다. 슬로우뉴스에도 동시발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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