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안철수가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약속했다. 새정치란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가 어떻게 ‘새정치’란 말인가. 2012년 대선 당시 정치개혁을 위한다며 국회의원 정수 축소, 정당 국고보조금 감액, 중앙당 폐지를 약속하며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던 모습에서 과연 얼마나 더 새정치에 다가섰는지 의문이다.
사실 기초선거 정당공천을 적용한 지방선거는 지금까지 두 차례에 불과했다. 이 제도 자체가 이제 걸음마를 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1991년 첫 지방선거부터 2002년 지방선거까지는 기초의원 정당공천이 없었다. 일천한 기초선거 역사에 비춰보면 정당공천을 통해 기초의회를 구성한 기간보다 정당공천 없이 기초의회를 구성한 기간이 더 길었다. 안철수는 정당공천 없던 기초의회가 지금보다 더 좋았던 옛 시절이라고 볼 근거가 하나라도 있는지 답해야 한다.
정당공천 없는 구의회와 정당공천 있는 구의회를 모두 경험한 분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무소속은 무소속인데 어느 당과 가까운 기초의원인지 서로 다 알았다고 한다. 정당 소속이라는 게 기초의원을 억압하는 통제장치가 된다는 점도 있지만, 반대로 개별 기초의원의 일탈을 제어하고 정당간 경쟁을 유도하는 측면도 있다는 게 그 분 설명이다.
안철수 의원(출처: 새정치연합 홈페이지)
정당공천제는 후보 난립을 차단하고 유능한 지역인재에게 정치기회를 보장하여 중앙당과의 일관성 있는 정책기조를 유지할 수 있는 긍정적 효과 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중앙예속이나 공천심사 부조리와 같은 문제들은 정당공천제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운영상의 문제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안철수는 빨간옷입고 다니는 무소속 후보나 파란옷 입고 다니는 무소속 후보가 새누리당 후보나 민주당 후보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할 수 있을까. 정당 소속인데도 기초의회가 이 모양이라면, 공천 걱정 안해도 되는 기초의회는 과연 얼마나 책임감이 커지겠는가 말이다.
풀뿌리 정치가 발전하려면 여성 등 사회적 약자가 훨씬 더 많이 기초의회에 진출해야 한다. 1991년 첫 지방선거에서는 당선자 전체를 통틀어 여성이 40명 뿐이었다. 비율로는 0.9%다. 1995년에는 72명(1.6%), 1998년에는 56명(1.6%), 2002년에는 77명(2.2%)에 그쳤다. 하지만 2006년 지방선거에선 여성 기초의원 당선자가 434명(15.1%)으로 급증했고 2010년에는 600명을 넘어서면서 21.6%까지 치솟았다.
여성 기초의원이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2002년까지는 비례대표제도가 없었고 2006년부터는 비례대표제도가 있었다. 여성 당선자 중 거의 대부분이 비례대표로 지방의회에 진입했다. 국회 차원에서 정치개혁방안으로도 거론되는 비례대표제도는 100% 정당공천이다. 정당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노선, 지향점에 따라 후보들을 내세우고 지지를 호소한다. 유권자들은 지지하는 정당과 노선 등에 따라 정당에게 투표하고 지지율만큼 '정당공천'받은 후보들이 국회의원 혹은 기초의원이 된다.
다시 말해, 여성의원 증가는 정당공천폐지가 아니라 정당이라는 정치제도가 있기에 가능했다. 여야 할 것 없이 자신들이 양성평등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정당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비례대표 후보 1번은 항상 여성으로 하는 등 적극적으로 여성 후보를 내세우고 ‘비례대표 여성 비율 50% 할당’을 도입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당명부 비례대표와 여성의석수 증가가 얼마나 중요한 관계가 있는지는 해외사례만 살펴봐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당명부 비례대표를 중시하는 선거제도를 가진 국가들(북유럽이나 독일 등)은 죄다 여성의원 비중이 높고, 그렇지 않은 국가들(미국이나 영국)은 여성의원 비중이 낮다. 정당공천을 없애고 나면 비례대표제는 어떻게 하겠다는건가.(바로 그런 이유로 정당공천폐지를 반대하는 여성정치인이 많다.)
김한길 대표와 새정치연합 안철수 중앙운영위원장.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촉구 정치권, 시민사회 공동기자회견. (2014-01-20. 출처:노컷뉴스)
정당공천이 그리 문제라고 주장하려면 광역의회와 국회에 대해서는 왜 정당공천 폐지를 말하지 않는지, 비례대표 폐지는 왜 말하지 않는지도 묻고 싶다. 거기다 정당공천 폐지가 새정치라면 그냥 지금처럼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남을 일이지 ‘새정치연합’은 뭐하러 만들고 신당 소속으로 후보는 뭐하러 내겠다는건지 내 머리로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안철수 논리대로라면 새누리당 민주당 모두 해산하고 모든 국회의원을 무소속으로 해야 한다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지방의회와 국회 모두 비례대표를 50% 수준까지 대폭 늘리는게 풀뿌리 정치를 풍요롭게 하는 '새로운 정치'를 위한 길이다. 안철수가 새정치를 위한 방안으로 내세워야 할 것은 정당공천 폐지라는 '헛발질'이 아니라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정치는 각 정당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후보를 비례대표로 선발할지 경쟁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국민들에게 더 이롭다.
비리 문제로 재보궐선거를 치르게 되면 원인제공한 정당에게 입후보 자체를 금지시키는게 책임정치를 강화하는 길이다. 국회의원과 지방의원 세비를 깍는게 아니라 오히려 지금보다 몇 배 더 주고 대신 김밥 하나까지 모두 세비에서 지출하고 내역을 죄다 신고하게 해서 숨을 곳이 없게 하는게 더 정치개혁에 부합한다.
국회의원 숫자를 줄일게 아니라 오히려 200명이나 300명 정도 더 늘려서 말 그대로 금뱃지에 인플레이션을 일으켜야 한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지금보다 200~300명 늘어난다면 말그대로 '개나 소나 국회의원'이 될 것이다. 그게 국회의원 특권을 줄이는데도 더 좋은 방법 아닐까. 그러므로 지방선거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한다면, 정당공천 폐지가 아니라 제대로 된 정당공천을 강화하는게 정치를 더 새롭게 하는 길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들 정당공천 폐지를 공약했다. 그걸 요구했던 국민들의 정치혐오증을 보며 ‘여의도는 비효율적인 곳’이라며 국회를 무시했던 전직 대통령 이명박을 떠올렸다. 이제 새누리당은 공약을 파기했고 민주당은 좌고우면한다. 새누리당은 왜 선거에서 연전연승하고 민주당은 연전연패하는지 이유를 보여주는 작은 단면이 아닌가 싶다. 안철수는 기초에 대해서만 약속을 지키자고 한다. 문제는 ‘창조경제’가 아니라 ‘경제’인 것처럼, ‘새정치’보다는 ‘정치가 우선한다’.
##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글을 바탕으로 수정 보완했음을 밝힙니다. 슬로우뉴스에 동시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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