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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사해

21세기 남미 좌파 대표주자 차베스, 그가 없는 베네수엘라

by betulo 2013.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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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쿠데타에 실패한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무들,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새로운 상황이 올 것이고 베네수엘라는 분명히 더 나은 운명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 후 자신이 꿈꾸던 ‘운명의 길’로 베네수엘라를 인도하던 그는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을 알았다. 투병중이던 지난해 4월 이렇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내게 삶을 주소서. 고통스러운 삶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삶만은 주소서. 아직 국민과 나라를 위해 할 일이 많습니다. 아직 절 데려가지 말아주소서.” (차베스, 불평등·가난과 싸운 사회주의 영웅이자 14년 집권 독재자)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숨을 거뒀다. 남미 좌파 진영, 미국과 베네수엘라 관계 등 다양한 측면에서 전세계 이목이 베네수엘라에 쏠리고 있다. 4월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베네수엘라와 남미는 상당히 다른 역사적 경로로 향하게 될 것이다. 차베스는 생전에 새로운 사회주의 실험이라는 찬사와 과격한 정책과 돌출적인 언행을 일삼는다는 비난을 함께 들었다. 

 

   차베스가 암 치료를 받기 시작한 건 2년 가량 됐다. 2011년 6월 쿠바에서 골반 부위 종양을 제거하면서 암세포가 발견되자 수술을 받은 뒤 쿠바를 오가며 세 차례에 걸쳐 세 차례에 걸쳐 악성종양 제거 수술을 했다. 지난해 2월에는 암이 재발해 다시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이어갔다. 

 

   네 번째 대선 기간이던 지난해 7월에는 기자회견을 열고 ‘암 완치’를 선언하고 10월에 치러진 대선을 완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지난해 11월 ‘추가치료’를 위해 네 번째 암수술을 받으러 쿠바에 갔다. 지난해 12월11일 아바나에서 암 수술을 받았고 지난달 18일 귀국했다. 결국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은 5일 차베스가 오후 4시25분 숨을 거뒀다고 공식 발표했다. 

 

   차베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지난해 12월 버스 운전기사 출신 노동운동가로 유명했던 마두로 부통령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마두로는 장례식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4월14일 대선에서 마두로에 맞설 후보는 중도우파 정의제일당 엔리케 카프릴레스다. 카프릴레스는 이미 지난해 10월 대선에서 야권 단일후보로서 차베스와 맞붙은 적이 있다. 카프릴레스는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을 존경하는 등 경제정책은 중도 성향이다. 하지만 외교노선은 차베스·마두로와 달리 친미·반이란이다. (차베스 사후 30일 내 대선, 부통령·우파 지도자 맞붙을 듯)


출처: 위키피디아


드라마같은 삶 살다간 카리스마형 지도자

   차베스는 1954년 7월28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남서쪽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교사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 1971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73년 칠레에선 선거를 통해 성립한 사회주의 정권을 이끌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미국을 등에 업은 쿠데타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차베스는 당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975년 임관한 차베스는 베네수엘라가 직면한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치지도자를 꿈꾸기 시작했다. 스물 여덟살이던 1982년 그는 젊은 장교들과 함께 사회주의 성향 정치모임인 ‘볼리바르 혁명운동’을 결성했다. 

 

   1980년대 말 베네수엘라는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하는 시장근본주의적 경제정책과 사회복지예산 삭감,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잔인한 무력진압 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당시 중령이었던 차베스는 동료 장교들과 함께 1992년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작전은 실패했다. 그런데 여기서 차베스는 드라마같은 삶의 첫 장을 장식할 투항 조건을 내건다. 그는 대국민 연설을 하게 해주면 항복하겠다고 했고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차베스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나 혼자 책임지겠다”며 대중들에게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는 2년 뒤 출소해서는 선거를 통한 집권을 도모하는 본격적인 정치가가 됐다. 그는 ‘제5공화국 운동’(MVR)을 창당했고 사회주의운동당, 애국당과 연대해 좌파연합 애국전선을 결성한다. 드디어 그는 44살이던 1998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56.2%의 표를 얻었다. 베네수엘라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 탄생했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그는 강력한 빈부격차 해소 정책을 편다. 무상의료, 무상 예방접종, 문맹퇴치 정책을 실시했다. 세계은행 통계를 보면 베네수엘라는 빈곤율이 2003년 62.1%이 될 정도로 빈부격차가 심각한 나라였다. 차베스는 빈농 정착촌을 꾸려 집과 땅을 제공하고 갖가지 보조금을 국민들에게 돌려줬다.

 

  효과가 나타났다. 2007년 빈곤율은 33.6%로 줄었고, 2011년에는 31.9%까지 내려갔다. 집권 이후 빈곤율이 절반 가량 줄어들었다. 실업률도 집권 초기 50% 수준에서 2011년에는 32%까지 낮췄다. 1인당 국민총소득은 2003년 3482달러에서 2011년 1만2000달러로 증가했다.

 

   이를 위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했을까. 그는 석유수출에서 나오는 이윤을 서민들에게 재분배하는 방식을 썼다. 2000년 재선에 성공한 뒤에는 외국자본이 소유한 석유회사를 국유화했다. 서민들은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불렀다. 기득권층은 격렬히 반발했다. 차베스가 반대세력을 지나치게 적대시한 것도 정치적 양극화를 악화시켰다. 

 

  남미 국가들의 경제정책을 연구해온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조돈문은 소득재분배와 국유화-공동경영이 차베스 경제정책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서민들을 위한 복지에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 있다”며 야당이 집권하더라도 평생교육, 식품지원, 재분배 등 불평등 완화 정책은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국유화-공동경영 정책은 경우가 다르다. 조돈문은 “차베스는 기간산업을 국유화한 뒤 상당수를 공동경영 즉 노동자 자주관리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실험을 했다”면서 “노동자 자주관리가 이상적으로 이뤄지지도 않았고 부작용도 많았다”고 평가했다.(조돈문 교수 인터뷰)

 

   차베스는 2007년 대통령 연임제한을 규정한 헌법을 개정하려고 국민투표를 시도했지만 부결됐다. 하지만 결국 2009년에는 국민투표에 성공했다. 점차 권위주의가 강해지는 것을 두고 비판이 거세졌다. 집권 기간이 길어질수록 반대세력도 결집하기 시작했다. 반목과 대립을 의식한 듯 차베스는 지난해 대선에서 승리한 뒤 “과거의 실수를 인정한다. 베네수엘라는 21세기 민주사회주의를 향한 행진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가 숨을 거두면서 ‘포용하는 정치’는 후임 대통령에게 넘어가게 됐다. 


 

차베스 사망과 주변국 파장

   차베스가 사망하자 베네수엘라는 슬픔으로 가득찼다. 수도 카라카스 중심가 상점과 식당은 일찍 문을 닫았고 차베스 모습이 그려진 붉은 셔츠를 입은 추모객들이 거리를 메웠다. 주변국에서도 추모 행렬이 줄을 이었다. 특히 좌파 진영에선 큰 슬픔을 표현했다. 쿠바에선 공식 애도 성명에서 차베스를 ‘피델 카스트로의 정치적 적자’라고 규정했을 정도다.

 

  8일 장례식에는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 등 33개국 정상들이 참석했다. 

 

   미국도 애도 성명을 발표했지만 결은 상당히 다르다. 오바마 대통령은 “베네수엘라 역사에 새 장이 열리고 있다”며 새 정부와 건설적 관계를 바란다고 밝혔다. 차베스가 생전에 강력한 반미 노선을 견지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차베스는 2006년 유엔 총회에서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악마’라고 비난한 적도 있다. 그는 당시 부시를 지목해 “어제 이 자리에 악마가 다녀갔다. 아직도 연단에서 유황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05년에는 석유를 시장가격보다 낮게 공급하는 카리브해 석유동맹인 ‘페트로카리브’를 출범시켜 남미 좌파 동맹을 구축한 것도 미국에 대항하는 지역세력 결합을 위한 성격이 강했다.

 

   차베스가 남긴 경제적 상황은 썩 좋지 않다. 인플레이션, 원유값 인상, 재정적자 급증, 통화정책 실패가 심각하다. 무엇보다 석유에 의존하는 개혁정책은 지속가능하질 않다. 차베스가 눈앞에 있는 인기와 성과에 급급하는 바람에 지나친 석유의존도와 저성장, 비효율, 연구개발 저투자 같은 중장기 과제에 소홀했던 것도 후임자가 풀어야 할 몫이다. (빈민구제·남미통합 기치로 ‘제2 볼리바르’ 혁명 열정)

 

   2002년 발생했던 쿠데타는 차베스와 미국의 갈등에 불을 붙였다. 쿠데타 세력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차베스는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시위 덕분에 사흘만에 쿠데타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베네수엘라와 미국의 관계가 앞으로도 계속 적대적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석유가 원인이다.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것도 미국이고 베네수엘라에서 채굴한 석유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도 다름 아닌 미국이다. 미국은 베네수엘라 석유를 제값에 사가는 유일한 강대국이다. (정치 적수이자 경제 파트너…미-베네수엘라 적대 청산할까)


출처: 한겨레


출처: 한겨레



   차베스는 생전에 중남미 좌파진영의 맏형 노릇을 자임했다. 석유를 값싸게 공급하며 돈줄 역할도 했다. 차베스 사망은 중남미 좌파진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최근 ‘중남미 좌파의 최후’라는 분석기사에서 막대한 자금력, 정치적 중량감, 위험을 무릎쓸 의지, 강력한 내부 장악력 등에서 차베스의 뒤를 이을 만한 인물은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구심점 잃은 남미 ‘좌파벨트’…와해냐 유지냐 ‘시험대’) 


  반면 조돈문은 “각각 좌파가 집권한 구조적 요인이 있”다면서 좌파가 집권하는 중남미 국가에 미칠 파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정책적 재정적으로 차베스에 기대고 있던 볼리비아나 베네수엘라 석유 수입으로 연명해온 쿠바 같은 카리브해 소국들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차베스는 이제 가고 없다. 차베스가 없는 베네수엘라와 중남미는 이제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한 언론기사에서 밝혔듯이 “21세기 남미의 역사는 ‘차베스 이전’과 ‘차베스 이후’로 나뉘어 서술될 것”으로 보인다. 


출처: 한겨레


출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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