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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8 05:30

아프로디테 고향에 밀어닥친 구제금융 사태

 

  지중해 동부에 위치한 인구 80만 작은 섬나라 키프로스가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호사가들은 잠잠해지는가 싶던 유로존 위기설을 다시 꺼내들며 호들갑을 떤다. 


  3월15일 트로이카(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 IMF 세 기관)은 키프로스 정부가 요구한 170억유로 구제금융에 대해 100억 유로만 지원하고 은행예금에 일회성 부담금을 통해 58억 유로 자금을 조달할 것을 권고했다. 10만 유로가 넘는 예금에는 9.9%, 그 이하 예금에는 6.75%를 부과해서 채무변제에 필요한 자금 약 170억유로 일부인 58억 유로를 마련하라는 것이다. 유로존 요구는 전례가 없는 다소 과격한 방안이었다. 키프로스 예금자들이 반발한건 당연해 보인다. 키프로스 의회는 부담금을 전제로 한 구제금융 방안을 부결시켰다. 


  논란을 거쳐 키프로스는 3월 24일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과 IMF 등에서 구제금융 100억 유로를 받는 대가로 과도한 은행 부문을 과감히 구조조정하기로 했다. 은행 구조조정 과정에서 고액 예금자들에게도 일정부분 손실을 부담시키는 데 합의했다. 니코스 아나스티아데스 대통령은 구제금융의 원인으로 지목된 은행권 부실의 책임자를 형사 처벌하도록 법관 3명을 임명하는 한편 은행으로부터 부당 대출 의혹을 받는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조사하기로 했다.


구제금융 반대시위 모습.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Ἀφροδίτη, 로마신화에선 비너스)와 그녀의 연인 아도니스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한 키프로스를 찾는 관광객은 해마다 240만명에 이른다. 전체 인구보다 세 배나 많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며 전세계인을 끌어들이는 곳이지만 한반도처럼 남북으로 분단된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1974년 이후 그리스계와 터키계로 갈라졌다. 여러 차례 정상회담을 개최하며 통일 문제를 협의했지만 2004년 유엔이 중재한 남북 키프로스 통일방안을 남 키프로스 주민들이 거부하면서 무산되는 등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키프로스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동로마제국과 오스만투르크가 번갈아 지배했던 역사 때문에 현재 키프로스는 그리스계와 터키계가 양분하고 있다. 1925년 영국 식민지가 된 키프로스는 1960년 독립했지만 1963년부터 11년에 걸친 내부 분쟁이 일어났다. 결국 그리스 군사정권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계 주민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친 그리스 정권을 세우자 터키가 이에 맞서 키프로스 북부를 점령한 이후 남·북으로 갈라졌다.


  현재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정식 승인을 받은 ‘키프로스 공화국’은 섬 전체의 59%를 차지하는 남 키프로스다. 남 키프로스는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했으며 현재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이다. 북 키프로스는 섬 면적의 37%에 이르지만 터키를 빼고는 국제적 승인을 받지 못했다. 유엔 평화유지군이 관할하는 완충 지역과 영국이 소유한 군사기지가 각각 영토의 3%를 차지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

  키프로스 사태는 아일랜드나 그리스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무리한 금융자유화와 규제완화가 불러온 참사다. 키프로스는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한데 이어 2008년에는 유로존에 가입했다. 이후 금융산업을 정책적으로 키웠다. 키프로스에서 금융업은 관광산업과 함께 키프로스 경제를 견인해 왔다. 키프로스 은행 전체 자산규모는 GDP의 8배나 되는데 이는 유럽 국가 중 아일랜드와 비슷한 수준이다. 키프로스 금융업이 성장한 배경에는 조세회피를 목적으로 한 외국자본 유입과 무관하지 않다. 


  키프로스 인구 80%가 그리스인이고 그리스어를 사용한다. 이런 점을 활용해 키프로스 은행들은 그리스 국채에 거금을 투자했다. 하지만 그리스가 재정위기를 맞으면서 키프로스도 유탄을 맞았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키프로스 은행 전체 부실대출에서 그리스에 대한 대출이 약 55%를 차지한다. 이로 인해 키프로스 은행들은 2011년 말부터 국제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가뜩이나 제조업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2009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실물경기 침체가 본격화되자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기록한 것도 악재였다. 



●러시아 고위층 비자금 관리처처로 악명높아

  키프로스 사태와 관련해 흥미롭게 봐야 할 대목은 키프로스 사람들 못지않게 러시아가 반발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구제금융 문제가 불거지자마자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긴급회의를 개최해 만일 키프로스 정부가 예금 부담금을 부과한다면 이는 ‘불공정하고 위험한 결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키프로스가 러시아 고위층의 비자금이 모여드는 조세회피처로 악명이 높다는 사정 때문이다. 


  시사IN 보도에 따르면 미국계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키프로스 은행 예금 680억 유로 가운데 러시아 투자자들이 입금한 자금이 190억 유로(약 21조원)라고 추산했다. 일부에선 예금 총액의 30%가 넘는 240억 유로 가량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키프로스 정부가 유로존 요구대로 부담금을 물린다면 러시아 투자자들은 20억 달러(약 2조 2000억원)가 넘는 손실을 입게 되는 셈이다(정다원, 시사IN, 288호, 46~47쪽). 



  러시아 고위층으로서는 세금 내기 싫어 키프로스에 비자금을 묻어놨는데 난데없이 예금 부담금을 내라고 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국제시민단체인 조세정의네트워크 상근연구원인 니컬러스 섁슨은 조세회피처를 다룬 책 ‘보물섬’에서 “구소련에서 흘러나온 범죄 연루 자금이 유럽을 통과할 때 거쳐 가는 최대의 피난처는 아마도 키프로스일 것”이라면서 “한 역외 금융업 종사자는 키프로스와 같은 역외 금융의 중간 기착지를 ‘국제적 악당들의 정거장’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하기도 했다(64쪽). 


  독일 정보부는 키프로스 은행들을 러시아 올리가리히(신흥 부유층)의 불법적인 돈세탁 창구와 조세회피처로 지목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로존 최대 채권국이자 구제금융 주도국인 독일 입장에선 구제금융을 지원해주는게 결국 러시아 좋은 일만 시키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결국 이번 키프로스 구제금융을 둘러싼 논쟁 이면에는 독일과 러시아가 벌인 알력이 작용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결과만 놓고 보면 독일의 입장이 더 많이 반영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독일 정부는 예금자 손실부담을 통해 구제금융 부담을 줄이면서도 재정위기 위협을 줄이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이번 키프로스 구제금융을 통해 국내 지지율 상승을 이끌어냈다. 주요 독일 언론들도 이번 키프로스 구제금융을 계기로 9월에 있을 총선에서 메르켈 총리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러시아는 구제금융 조치로 인해 큰 손실을 볼 수밖에 없는데도 푸틴 대통령이 나서서 구제금융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입장을 급선회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여기에는 정치적 계산이 숨어있었다고 분석했다. 다시 말해, 키프로스가 러시아의 최대 해외직접투자 및 외국인직접투자 국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러시아가 단기간에 키프로스와 맺어온 경제협력 관계를 단절하기는 정치적으로 부담이 너무 크고 오히려 키프로스에 대한 지원을 통해 러시아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계산이라는 것이다. 


  러시아는 2011년 키프로스에 25억 유로에 이르는 차관을 제공했다. 키프로스는 최근 러시아에 차관상관 유예(2016년→2021년), 금리인하, 50억 유로 신규차관까지 요청했다. 만약 러시아가 25억 유로 차관 만기 연장을 거부하면 키프로스는 2016년에 국채만기규모가 30억 유로나 된다. 하지만 차관 만기 연장을 해주면 5억 유로로 줄어든다. 키프로스는 러시아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키프로스는 어디로

  우여곡절 끝에 키프로스에 대한 구제금융은 합의에 도달했다. 이에 따라 단기적으로는 위기를 봉합했다. 하지만 키프로스 정부의 자체 자금마련 계획에도 불구하고 트로이카가 요구한 58억 유로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추가 구제금융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원활하게 은행구조조정에 성공한다면 키프로스 은행산업은 안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별다른 제조업 기반 없이 관광산업과 금융업만으로 굴러가는 경제는 외풍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경제모델 개발이 발등에 불로 떨어졌다. 


이 글에서 사용한 모든 표와 그림은 아래 보고서에서 인용한 것이다. 


13.03. 대외경제정책연구원_ 키프로스 구제금융안 분석 및 전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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