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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4 01:59

주민참여예산의 교훈 '민주주의가 밥먹여 준다'


 로시타 페레이라 다 시우바 산토스. 이름이 참 길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가방끈이 짧은’ 브라질 할머니다. 평생 브라질 남부 도시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주부 겸 옷가게 점원으로 일했다. 빈부격차가 크고 교육열도 높지 않은 이 나라에서, 엘리트들 얘기가 다 옳은 얘기려니 생각하고 굳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못했던 이 할머니가 어느날 스스로 야간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주경야독 끝에 몇 년만에 고등학교 졸업장까지 받았다. 졸업장을 펼쳐 보이는 표정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 할머니에게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영화 ‘인셉션’에서 주인공 ‘코브’는 아주 작은 단순한 생각이 자라나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건 현실이 아냐’라는 단순한 생각이 현실을 부정하며 자살을 선택하게 만든다. ‘아버지는 내가 다른 길을 가길 원하신다’와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가 만나 아버지가 평생 일군 거대기업을 아들이 스스로 해체하도록 이끈다. 로시타라는 브라질 할머니에게도 단순한 생각들이 자라나 삶을 바꿔나가는 중이다. 그것은 확신하건데 ‘민주주의가 내 삶을 바꾼다’와 ‘주민참여예산에 참여하는 것은 행복하다’ 같은 게 아니었을까. 

 이 할머니는 1990년대 초반부터 동네 주민참여예산에 참여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봉사활동을 즐기는 낙천적인 성격인 터라 마을 활동에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대의원(delegado)을 7년이나 하게 됐다. 포르투알레그레는 1988년 노동자당(PT) 소속 시장이 당선된 이후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간접자본 부족, 열악한 재정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풀뿌리단체 제안을 받아들여 주민참여예산을 세계 최초로 시작했다. 


  주민참여예산의 취지는 주민들이 토론을 통해 주민들에게 필요한 예산을 상향식으로 구성해 낸다는 것이다. 그들이 결정하던 예산에서 우리가 결정하는 예산이라는 혁명적 발상이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주민참여예산을 통해 그전까진 그림의 떡이었던 상하수도와 대중교통 정비, 교육예산 확충, 빈곤층 자활사업에 예산을 배정하게 됐다. ‘민주주의가 밥먹여 주는’ 시대가 열렸다. 


 로시타 할머니는 주민참여예산 대의원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갈수록 커졌다. 많이 배운 이들이 뜬구름잡는 얘길 하거나 대다수 시민의 이익에 반하는 발언을 할때마다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고 싶었다. 주민들을 위하는 예산이 더 많이 배정되도록 하려면 근거를 들이대며 다른 대의원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아는게 너무 없다는 생각이 스스로 불만스러웠다. 공부를 할수록 세상을 보는 눈은 넓어졌고 자신감도 커졌다. 주민참여예산은 이 할머니에게 행복감 뿐 아니라 성취욕까지 주는 복덩이였다. 

 브라질 주민참여예산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포르투알레그레를 방문한 건 지난해 7월이었다. 우리 기준으론 여름이지만 그쪽 기준으론 한겨울이었다. 낮에도 가을 날씨였고 밤에는 제법 쌀쌀했다. 하지만 도시 곳곳을 누비는 동안 느꼈던 뜨거운 감동에 비한다면 날씨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참 부러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저런 게 아닐까. 민주주의가 밥먹여준다, 민주주의가 행복을 가져온다는 경험을 더 많이 공유하도록 하려면 주민참여예산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텐데. 

 지난 5월2일 서울시의회는 본회의에서 찬성 64명, 반대 2명, 기권 3명으로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조례를 제정했다. 조례 자체는 전국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늦게 제정됐지만 내용만 놓고 본다면 가장 내실있다고 할 만 했다. 서울시와 서울시의회, 풀뿌리 시민단체가 3개월 가량 치열한 토론 끝에 내놓은 결과물이라는 점도 기대를 높였다. 1차 관건은 주민참여 정도였지만 더 큰 고민은 과연 얼마나 알찬 결과를 이끌어내느냐였다.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은 맨 먼저 시민과 25개 자치구를 대상으로 사업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모인 시민제안사업이 402개(1989억 원). 모든 주민참여예산위원은 자치구별 사전심사소위원회와 분과위원회에 속해서 자치구별, 분과별 심사에 참여했다. 그렇게 심사를 거쳐 총회에 상정된 사업은 240개(876억 원)였다. 마침내 9월 1일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주민참여예산 한마당에서 위원들은 240개 사업 가운데 1인당 72개 사업을 각자 선정했다. 이날 저녁 6시부터 열린 총회에선 위원들이 선정한 결과를 바탕으로 다득표순으로 132개 사업(499억 4200만 원)을 2013년도 참여예산사업으로 최종 추인했다. 이 사업들은 내년 서울시 예산안에 반영되어 시의회의 심의 확정을 거쳐 2013년 시행하게 된다.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은 많은 성과를 거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성취는 ‘우리가 참여하는 민주주의가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참가자들에게 각인시켰다는 점이라고 믿는다.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작은 성취가 쌓여야 하듯이 우리에겐 성공적인 주민참여예산 운영이란 경험을 갖게 됐다. 주민참여예산위원 250명 가운데 190명이 평일도 아닌 토요일 오후에 참석했다는 것부터가 그렇다. 그 중에는 어린 자녀 두 명을 데리고 나온 아빠도 있었고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 시험준비에 여념이 없는 고시생도 있었다. 주말이면 잠으로 피곤함을 달래던 직장인도 있었고 육아에 매달리는 주부도 있었다. 

 토론을 통해 토건예산이 아닌 생활예산을 우선 선택했다. 온정주의와 나눠먹기 유혹도 스스로 극복했다. 가장 높은 표를 받은 사업이 ‘도봉구 창동 문화 체육센터 장애인 편의시설 확충’이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사업비가 9500만원에 불과한 이 사업은 투표권을 행사한 190명 가운데 108명한테서 지지를 받았다. 분과위원회 회의를 지켜본 시 간부가 “시의원들보다 더 깐깐하다.”며 혀를 내두른 건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우리는 토론과 집단지성을 통해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고 ‘좋은 정부’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좋은 정부는 다시 우리 삶에 ‘사람을 위한 변화’를 이끌어낸다. 틈만 나면 해탈이라도 한 듯 ‘이게 다 아무개 때문이야’를 되뇌며 정작 투표를 안하거나, 투표해놓고 관심을 끄는 헛똑똑이들을 위한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좋은 정부와 더 나은 민주주의는 좋은 선택과 정직한 참여 속에서 빛난다. 


이 글은 <참여사회> 10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www.peoplepower21.org/Magazine/957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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