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전 1년이 됐다. 기꺼이 ‘선생’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기에 아깝지 않은 흔치 않은 어른이었던 홍세화를 십여 년 전 딱 한 번 만나봤다. 그는 인권연대에서 주최한 수요대화모임 초청강사였다. 당시 홍세화는 차별과 낙인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한국에서 “너 전라도 사람이냐”는 질문, 유럽에서 “너 유대인이냐”는 질문이 어떤 맥락 속에 있는지 예로 들었다. 그 이야기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한국 사회에서 “너 전라도 사람이냐”는 질문은 구별짓기와 낙인찍기를 상징한다. “너 경상도 사람이냐” 혹은 “너 서울 사람이냐”는 질문에서는 그런 맥락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미국에서 “너 기독교도냐”와 “너 무슬림이냐”라는 두 질문과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최근 서울서부지법 폭동에서 폭도들이 “너 중국 사람이냐”라고 묻는 장면을 뉴스에서 봤는데 홍세화가 말했던 특정한 질문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한국 사회에서 지역차별은 많이 줄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제는 서울이 갖는 지위가 너무 압도적이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서울이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사실 부산이나 내 고향 마을이나 아무 차이가 없는 똑같은 ‘시골’이다. 그래도 어떤 기억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지역감정’이라는 근본없는 물타기 용어로 통용되던 호남차별은, 차별이 흔히 그렇듯이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대학 시절 어떤 자리에서 “전라도 사람은 뒷통수 잘 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과 얘길 해본 적이 있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이 다 그렇게 얘기한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하는 건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혹시나 싶어 전라도 사람한테 배신당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그런 적도 없다. 그들은 알고 지내는 전라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들은 나와 인사한 지 한두 시간밖에 되지도 않았는데 내 앞에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들은 내가 전라도 사람일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마도 내가 겁나 완벽한 서울 사투리를 썼기 때문일지도 모르것다.)
그때 경험은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해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오래 만날 사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상대방이 회사 상급자나 거래처 간부처럼 뭔가 나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의 고향을 밝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상황에 빠질 가능성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간편한 건 그냥 고향 얘기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것도 아니고 서로 고향 얘기해봐야 짜증나기 십상인데 뭐하러 고향 얘길 하겠는가. 거기서 좀 더 나가는 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같은 전라도 사람끼리 얘기할 때조차 “나는 태어나기만 전라도일 뿐 어릴 때 (서울로) 이사 와서 잘 몰라요”하는 식으로 회피한다. 과거 일본인이 "우린 명예 백인"이라고 하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좀 더 심한 사람들은 아예 고향 자체를 세탁해 버린다. 차마 경상도가 고향이라고 할 순 없을테니 서울이나 인천, 경기 출신이라며 적당히 둘러댄다. 고위공무원, 심지어 장관 차관 중에서도 그러고 다니는 분들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짧게나마 대통령선거 후보를 지냈던 한덕수는 고향이 서울이라며 서울 사람 행세를 했던 경우였다.
초등학생 때 고향 전주를 떠나 서울로 이주했고 서울에서 초중고는 물론 대학까지 졸업하고 수십년을 서울에서 살았으니 서울을 고향이라고 하는 게 아주 이해 못할 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두 가지는 불편했다. 하나는 그가 어디서 태어났고 언제 서울로 이사갔는지 뻔히 알기에 기사에 ‘전북 출생’이라고 썼던 기자들에게 굳이 전화해서 고쳐달라고 항의했다는 증언을 들었을 때였다.
또 하나는 고향을 이리저리 갈아끼웠다는 걸 알았을 때였다. 예전 신문기사를 찾아보니 한덕수는 1996년과 1997년에는 분명히 서울출생이라고 했는데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 고위공무원 인사발표를 했던 1998년에는 갑자기 ‘전북 출생’이라고 출생지를 바꿨다. 이런 인사동정 기사는 당사자가 밝힌 프로필이 십중팔구 그대로 실리기 때문에 한덕수 스스로 고향을 달리 밝혔을 가능성이 100%다. 그가 '통상의 달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탁의 달인'이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고향을 일부러 숨기거나 세탁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들이 느꼈을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다만 필요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한 것 또한 사실이다. 김영삼 정부까진 서울 사람 행세를 하다가 김대중 정부가 되자마자 ‘나도 (사실은) 고향사람입니다’ 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이명박 정부 이후엔 다시 서울 사람 행세를 하기 십상이다.
한덕수는 지난 5월 1일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다음날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았다가 문전박대를 당하자 “저도 호남 사람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미워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신문에서 이 발언을 듣고 보니 한덕수에게 따뜻하고도 구수한 고향말로 대답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병헐 사랑이 다 얼어죽었다냐. 니미 코꾸녁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인권연대에 기고한 글을 수정보완했습니다.
두리안, 두리안을 먹어봤다 (1) | 2024.09.23 |
---|---|
지역신문은 지속가능한가 (0) | 2024.07.02 |
2024년을 앞두고 詩 한 수 읊어봤다 (0) | 2023.12.27 |
국가유공자 유족으로 산다는 것 (0) | 2023.03.07 |
역사에 공짜는 없다 (0) | 2023.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