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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사해/순회특파원(2011)

[중동취재기] 한국이 운명이 된 아랍인, 중동이 운명이 된 한국인

by betulo 2011.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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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취재기를 어떻게 마무리할까 고민 많이 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을 찾았다. 중동 출신과 한국 출신으로 각자 한국과 중동에 운명처럼 얽힌 경우다. 이들을 통해 한국과 중동이 서로 더 잘 이해하고 더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봤다.

이집트인 에즈딘 알하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국은 제게 하나님(알라)이 정해주신 운명입니다.”

 
해외여행을 나가서 한국인 가이드를 만나기는 쉬워도 한국어가 가능한 현지 가
이드를 만나긴 여간해선 쉽지 않다. 이집트인 에즈딘 알하산은 이집트에서 유일한 한국어 전문 관광가이드다. 그가 들려주는 자신과 한국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치 전생의 연이 이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에즈딘은 어릴 때부터 동양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가 중국어학과 교수였던데
다 동생과 함께 가라데 국가대표 선수로 세계선수권대회에도 참여했다. 당시만해도 한국어보다는 일본어를 배우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이집트를 통틀어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도 달리 없었다.

일본대사관을 찾아갔다. 그런데 석연찮은 이유로
두 번이나 떨어졌다. 반면 한국어는, 에즈딘의 아버지가 1994년에 카이로에서 열린 도서박람회에서 한국영사관 직원에게 나중에 한국어 교육기관이 생기면 연락을 달라고 말했는데 1년이 지나 연락이 오면서 기회가 생겼다. 그렇게 그는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8개월 과정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한국어 공부에 매진했다. 공부할수록 한국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 그는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에도 에즈딘 손에 13000달러를 쥐어주었다. 2년 정규과정을 마치고 카이로에 돌아와 한국기업에 취직하려고 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일로 포기해야 했다.

“면접을 봤는데, 한국 회사에선 한국어보다 영어를 잘하는 직원을 원하더라고요. 어렵
게 배운 한국어를 잊어버릴까봐 고민 끝에 가이드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1년 반 동안 준비한 끝에 가이드가 됐지만 다시 고난이 닥쳤다. 가이드
면허증을 딴 때가 1998년이었다. 외환위기 직후라 한국인 관광객 자체가 적어서 일거리가 없었다. 한국 여행사에서도 이방인인 그에게 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또다시 1년 3개월 동안 실업자 신세가 됐다.

 1999년 8월14일 기적이 찾아왔다. “어떤 한국 여행사가 한국(인) 가이드가 있
느냐고 묻자 이집트 여행사에선 한국(어) 가이드 있다고 회신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일거리가 생겼죠. 한국여행사에선 가이드 이름과 연락처를 보내달라고 했는데 마침 이집트 여행사 팩스가 고장이 난 거예요. 내 프로필이 하루 늦게 한국 여행사에 도착했는데 그 동안에 한국인 관광객들이 이집트에 당도해 버렸죠. 그들을 가이드를 하는데 둘째날부터 제 전화기에 불이 났어요. 한국 여행사에선 날마다 전화를 해서 내가 일을 잘하는지부터 믿을만한지까지 꼬치꼬치 캐묻더군요. 다행히 손님들 반응이 좋으니까 내게 1년 동안 일을 맡기더라고요.”

 공항에서 손님들을 보내고 나서 에즈딘은 두 시간 동안 계속 울었다고 했다. 그
는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지 5년만에 정식으로 돈을 벌었다. 그 동안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걸 생각하니 목이 매었다.”고 회상했다.

한국과 에즈딘의 인연은 그
가 한국인 신부를 맞으면서 더욱 굳건해졌다. 관광객과 가이드 관계로 처음 알게 된 그들은 이슬람과 개신교라는 종교 차이도 극복했다. 에즈딘은 “종교가 다를 뿐 결국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니 아무 문제가 없다.”면서 “우리는 성경과 쿠란을 함께 읽으며 서로에 대해, 그리고 상대방의 종교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됐고 동시에 각자의 종교에 대한 믿음도 더 깊어졌다.”고 말했다.

 에즈딘은 가이드 일을 하면서 한국과 이집트가 서로 얼마나 무지하고 오해가 많은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1999년에 한 방송사를 안내했는데 그 분들이 제게 베두윈족이 낙타 오줌으로 목욕하는 걸 촬영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에 그런게 어디있느냐고 했는데도 책에서 봤다며 막무가내였죠.”

그는 “그래도 요
즘은 이집트에 여행오는 분들은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나보다 많이 알 때도 있어서 내가 오히려 배우게 된다.”면서 “한국인들에게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 종교를 알려 서로 더 많이 이해하고 친해지도록 다리를 놓는게 바로 하나님이 내에게 맡긴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SK건설 아부다비지사 이지영 과장


 “내가 중동에서 5년이나 있게 될 거라고는 저 스스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죠. 아무래도 숙명인 게죠.”


 SK건설 아부다비 사무소 건설사업분야에서 일하는 이지영 과장의 이력은 여러 모로 특이하다. 건설사업분야 주재 인력 30여명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직접 안전모 쓰고 건설 현장을 경험한 경우는 국내 건설회사를 통틀어 유일하다고 할 정도다. 그것도 낮 기온이 40도를 가볍게 넘는 중동에서 직접 현장을 뛰며 밑바닥 건설 일을 배웠다.

 이 과장이 중동에 발을 붙인 건 올해로 벌써 5년째다. 어릴때 부모를 따라 호주로 이민가 그 곳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뒤 얻은 첫 직장이 UI 전략기획실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최규선 게이트’로 유명한 최규선이 부회장으로 있는 그 회사에서 그는 이라크 북부 쿠르드 자치정부에서 건설 수주를 맡으면서 중동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당시는 김선일씨 피랍사건이 발생한 직후였어요. 한국 국적으론 비자가 안나왔죠. 제가 호주 시민권자여서 입출국이 자유롭다는 이유 때문에 저를 그곳에 보낸 거였죠.”

 쿠르드 지역을 숱하게 왔다갔다 하며 그 곳 자치정부 고위인사들과 인맥을 쌓아갔다. 나중에는 두바이 지사장까지 승진해 이라크 관련 사업을 추진했다. 한국 기업은 경고 소리만 나오면 있는 약속도 취소했지만 그는 방탄복을 입고 쿠르드 자치정부 인사를 만나러 어디든 달려가면서 신뢰를 쌓았다. “2006년까지 UI에 있다가 2007년에 SK건설에 입사했어요. 중동에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라크에선 언제나 총을 든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있는데다 음식도 안맞아서 일주일 내내 설사하기도 하고 너무 힘들었어요.” 하지만 SK건설에 입사 직후 그가 맡은 업무는 또다시 중동이었다. 


 중동에서 이 과장이 맡은 일은 해외 영업이었다. 영어 실력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 과장이 보기에 핵심은 영어가 아니라 현장을 아느냐 모르느냐였다. 현장을 모르면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결국 빈 수레라는걸 깨달은 뒤 현장 근무를 자원했다. 김형호 SK건설 아부다비 센터장은 “얼마나 힘들지 잘 아니까 처음엔 말렸지만 본인 의지가 워낙 강했다.”면서 “1년 반 동안 여느 남자 직원과 똑같이 일하는데 당시 만났던 협력업체 관계자들이 지금의 이 과장을 못 알아볼 정도”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 과장은 “건설현장용 안전신발은 여성용이 없어서 한국에서 주문제작을 해야 했다.”면서 “한국 건설회사 통틀어서 현장을 뛰는 여직원은 나 혼자”라고 털어놨다. 건설회사에선 여직원 현장 뛰는 것 자체가 희귀하고, 현장에서 받지도 않으려 한다. 해외 건설회사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부모님에게 얘기도 안하고 현장 나갔어요. 이라크 갔던 것도 보도를 통해 아시고는 많이 속상해하셨는데 나중에 현장에 뛴다는 얘길 했다니 ‘드디어 니가 미쳤구나’ 하시더라요. 그래도 요즘은 많이 풀어졌죠.” 


 현장 일을 하면서 이 과장은 너무 힘들어 남몰래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했다. 건축학과 출신도 아닌데다 남자도 아니었지만 건설현장은 그런 걸 고려해 줄 만큼 한가한 곳이 아니었다. “노가다라는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칠었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욕도 들어보고요. 나는 그런 욕은 깡패영화에서나 하는 줄 알았거든요. 미친년 소리를 하루라도 안들은 적이 없었죠.”

그래도 현장을 마치고 영업을 하니까 이 과장 눈에 새로운 게 보이기 시작했다. 두바이 현지 기업 관계자들과 만나는데 대화가 술술 됐다. 많고 많은 프로젝트 중에서 할 수 있는 것과 거절해야 하는 것이 자연스레 구별이 됐다. 현장 경험이 없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5년에 걸친 중동 경험 그리고 현장 경험을 통해 이 과장은 이제 아랍에미리트 고위급 인사들과도 인맥을 쌓아가고 있을 정도가 됐다. 중동 정세에 대한 나름의 생각도 생겼다. 그는 “지금은 이익이 아니라 생존이 최우선 목표”라면서 “사업을 수주하는데 단가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 중국 업체들도 치고 올라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직 준공 사진을 못 찍어 봤다.”면서 “그런 사진 하나는 찍고 싶다. 중동은 별 수 없이 숙명인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이 과장은 중동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중동에 와서 돈을 벌고 싶으면 이 곳을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중동 사람들의 뼛 속까지 공부하지 않고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겠다는 건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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