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칭기스칸6

<성무친정록> 칭기스칸 연대기 원문 《聖武親征錄》 序 『聖武親征錄』一書, 乾隆間, 修四庫書時, 以其序述無法, 詞頗蹇澀譯語互異, 未著於錄, 僅存其目於史部雜史類中, 錢竹汀先生始表章其書, 爲之跋尾, 道光以後後學者頗治遼金元三史及西北地理. 此書亦漸重於世. 張石洲․何願船二先生始爲之校勘, 而何氏治之尤勤. 其歿後, 稿本流傳京師. 光緖朝士若順德李仲約侍郞, 萍鄕文道希學士, 嘉興沈子培先生, 遞有增益, 歲在甲午桐盧袁重黎太常刊之於蕪湖, 是爲此書, 有刊本之始顧張何二家所據本雖云出竹汀先生家, 然輾轉傳鈔謬誤百出, 石洲僅得翁覃谿學士家藏本一校之無大懸絶也. 余前在海上, 於嘉興沈先生座上見其所校『說郛本親征錄』, 爲明弘治舊鈔與「何本」異同甚多. 先【2쪽】生晩歲不甚談元史事然於「說郛本」猶鄭重手校未幾先生歸道山其校本遂不可見. 比來京師膠州柯鳳孫學士爲余言元太祖初起時之十三翼, 今本親征錄不具「說.. 2011. 8. 22.
장춘진인서유기 추억속에 묻은 나날(1) 장춘진인서유기는 전진교의 큰스승인 장춘진인이 칭기스칸의 초청에 응해 서역을 여행해 칭기스칸과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위키백과사전에 따르면 장춘진인의 본명은 구처기(丘處機; 1148~1227)로, 도교 종파인 전진교의 도사이다. )은 그 존칭이다. 그는 전진교를 연 왕중양의 제자 북칠진(北七眞) 중 한 명이며, 왕중양, 마옥, 담처단, 유처현에 이어 전진교의 5대 장문이었다. 전진교 용문파(龍門派)의 개조이기도 하다. 장춘진인은 1222년에 서아시아 원정 중이던 칭기스칸의 초청을 받았다. 고령이었지만 제자 이지상 등과 함께 멀리 서역까지 여행을 했으며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칭기스칸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 칭기스칸은 장춘진인에게 몽골 제국의 점령지 어디서라도 전진교를 보호하.. 2009. 2. 9.
알랑 고아, 곱디 곱던 그 여인 "저기서 이쪽으로 오는 사람들 가운데 한 마차에 앉아 있는 한 아가씨가 아름답다.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여인이 아니라면 아우 너에게 주겠다." 형인 도와-소코르는 아우 도본-메르겐과 함께 보르칸칼돈 위로 올라갔다. 그 곳에서 그들은 퉁겔리크 강을 따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기들 쪽으로 오는 것을 발견했다. 도와-소코르는 이마 가운데 눈이 하나 더 있어서 남들보다 몇 배나 멀리 볼 수 있었다. 무리 가운데 마차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을 발견한 도와-소코르는 그 여인이 미혼이라면 아우의 배필로 맞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리고는 도본-메르겐을 산 아래로 내려 보냈다. 형 도와-소코르는 과연 천리안이다. 마차 위, 엘지게라고 하는 아녀자들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든 의자에 앉아 있던 여인. 그 여인은 곱디 곱기.. 2007. 7. 27.
칭기스칸 조강지처 납치사건 어느 날 밤, 잠을 자고 있던 테무진과 가족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었다. 한 두 명이 아니다. 불길한 예감에 서둘러 도피할 말을 찾았다. 몽골에서는 보통 승용마로 쓰는 말만 겔(Ger) 옆에 매어 두고 나머지는 모두 방목한다. 『몽골비사』에는 여덟마리의 말이 겔 옆에 매여 있었다고 한다. 모두들 말에 올랐지만, 테무진의 아내 버르테가 탈 말이 모자랐다. 그녀는 급한대로 양털을 쌓아둔 마차 안에 몸을 숨겼다. 테무진은 숲 근처까지 도주한 이후에야, 기습자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바아토르와 생긴 해묵은 원한을 풀러 온 메르키트 부족이었다. 테무진 일행은 재빨리 몸을 피한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차 안으로 피신했던 버르테는 생포되어, 인질로 끌려가는 신.. 2007. 7. 23.
코빌라이(쿠빌라이)가 카간이 되기까지 대몽골제국의 네 번째 카간인 '멍케'는 칭기스칸의 손자로서 카간이 되기 전부터 그 능력을 검증 받은 사람이었다. 여러 나라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유클리드 기하학을 비롯해 동·서의 학술과 문화에 능통했다. 동쪽으로는 아버지 톨로이를 따라 금나라의 숨통을 끊어버린 전쟁에 참여했다. 서쪽으로는 바토(Batu, 칭기스칸의 큰아들인 조치의 아들)와 함께 헝가리까지 나아갔다. 멍케는 명실상부한 "준비된 황제"였다. 그는 지난 수년간 정체상태에 있던 세계 정복계획을 다시 추진했다. 동으로는 남송을 정복하고, 서로는 지중해를 넘어 유럽까지 나가고자 했다. 남송 공략의 책임자가 바로 그의 친동생인 코빌라이였다. 코빌라이의 젊은 시절 행적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1251년, 그는 서른 일곱 살의 나이로 세계 무대의.. 2007. 7. 18.
칭기스칸은 주당이었다? “몽골인의 풍속에서는 주인이 술잔을 들어 손님에게 권했는데 손님이 아주 조금이라도 술을 남기면 주인은 그를 다시는 대접하지 않는다. 반드시 손님이 완샷을 해야 좋아한다. … 그들이 술을 먹는 풍속은 나란히 앉아 서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한 손으로 잔을 들면 나에게 술 한 잔 하라는 뜻이다. 내가 술을 한입에 비워야 그 사람도 마실 수 있다. 혹은 두 손으로 잔을 들어 나에게 주는데 그러면 내가 마신 다음에 그에게 똑같이 술을 따라 줘서 술을 돌려 먹는다. 이렇게 하게 되면 쉽게 취하게 된다. 그러면 취해서 울고, 싸우고, 실례하고, 토하고, 드러눕는다. 그렇게 해야 주인이 크게 기뻐하면서 ‘손님들이 모두 취한 것은 나와 한마음이 되었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칭기스칸 .. 2007.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