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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몽골 이야기

칭기스칸 조강지처 납치사건

by betulo 2007.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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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잠을 자고 있던 테무진과 가족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었다. 한 두 명이 아니다. 불길한 예감에 서둘러 도피할 말을 찾았다. 몽골에서는 보통 승용마로 쓰는 말만 겔(Ger) 옆에 매어 두고 나머지는 모두 방목한다.


『몽골비사』에는 여덟마리의 말이 겔 옆에 매여 있었다고 한다. 모두들 말에 올랐지만, 테무진의 아내 버르테가 탈 말이 모자랐다. 그녀는 급한대로 양털을 쌓아둔 마차 안에 몸을 숨겼다.


테무진은 숲 근처까지 도주한 이후에야, 기습자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바아토르와 생긴 해묵은 원한을 풀러 온 메르키트 부족이었다. 테무진 일행은 재빨리 몸을 피한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차 안으로 피신했던 버르테는 생포되어, 인질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테무진의 어머니 허엘룬-우진은 원래 정혼자가 있었다. 칠레두라는 이름의 메르키트 부족 사람이었다. 허엘룬은 시댁으로 가던 도중에 한 남자에게 납치되어, 그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 그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 납치범이 예수게이-바아토르였다. 당시 허엘룬은 칠레두에게 자신의 속옷을 벗어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몽골 역사서인 『몽골비사』에는 위의 사건을 예수게이-바아토르가 허엘룬을 우연히 만나면서 벌어진 "우발적인 납치극"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몽골비사>의 내용을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기록이 '서사시' 형태를 띠고 있는 데다, 내용이 압축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몽골비사>를 근거로 당시 몽골에서 약탈혼이 유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허엘룬과 버르테 납치사건을 제외하고는 유사한 기록이 전무하다. 버르테 사건은 허엘룬 납치에 대한 일종의 보복극의 성격을 지닌다. 그럼 '허엘룬'은?


허엘룬은 몽골부족 가운데 옹기라트씨족 출신이다. 딸 아이를 단장시켜 유력자에게 시집보내는 것으로 난세의 처세술을 삼는 전통을 가진 씨족이었다. 옹기라트씨족이 몽골족과 불화가 끊이지 않던 메르키트 부족에 딸을 시집보낸 것도 그런 처세의 일환이었음이라. 이런 씨족의 딸이 어디로 시집가느냐를 보면 누가 패권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예수게이-바아토르에겐 정치적인 속셈이 있었다.


그는 허엘룬을 납치해 아내로 삼음으로써 몽골 부족의 자존심을 세우면서, 큰 정치 세력인 옹기라트 씨족을 처가로 만들 수 있는 일석이조의 이익을 얻었다. 혼란스런 시대에 정치적 동맹자를 확보하는 것은 야심가의 으뜸가는 덕목이다.


당시 테무진은 신혼의 아내를 납치당했다. 그는 복수를 위해 자신의 아버지와 안다(Anda: 의형제)를 맺었던 옹칸에게 달려갔다. 물론 그 이전에 테무진과 옹칸 사이에는 일종의 밀약이 있었지만. 어떻든, 테무진은 위기를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에는 성공했다.


옹칸은 테무진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도 하듯이 또다른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자모카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자모카는 어린 시절 테무진과 안다를 맺은 사이였다. 자모카도 테무진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그들은 연합해서 메르키트를 기습 공격하기로 약조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아프가니스탄과 벌이는 전쟁의 앞 모습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면 뒷모습은 뭘까. "석유를 위한 전쟁"? 아니면 "전세계를 내 품안에?" 그럼 옹칸은? 메르키트는 부유한 족속이었다. 명분도 좋다. 악의 무리를 응징하러 가잔다. 물론 승리하면 많은 전리품을 사이 좋게 분배할 수 있다.


옹칸으로서는 이번 기회에 잠재적인 적국을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런 좋은 기회를 자모카도 놓칠수 없었다. 테무진도 마찬가지. 작전은 어쨋든 테무진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기습공격은 성공했다. 테무진, 자모카, 옹칸, 이 모두가 원하던 것들을 손에 넣은 듯이 보인다. 테무진은 아내를 되찾았고, 옹칸 및 자모카와 돈독한 관계도 다져놨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와 자모카와 테무진은 공동유목을 시작했다. 이것은 최고의 '동맹' 결성의 방식이었다. 더 나아가 테무진은 이번 사건을 야망 실현의 계기로 만들어 나갔다. 그럼 버르테는?


테무진이 버르테를 구했을 때, 그녀는 만삭의 몸이었다. 얼마 후 버르테는 첫아들을 낳았다. 모두들 뭔가 석연치 않은 분위기다. 공식적으로는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물론 그건 한참 뒤의 일이다.


샤만이 특유의 정치적 임무를 수행했다. 신생아의 부정을 제거하는 의식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갓난아이는 순결한 몸과 영혼으로 거듭났다. 아기 이름은 '조치(Jochi)'라고 지었다. 몽골어로 손님이란 뜻이다. 손님처럼 찾아온 아기라는 뜻일까? 아니면 손님처럼 대접하겠다는 뜻?(몽골은 손님대접에선 지금도 세계최고수준이다)


앞에서 언급한 조치의 출생문제를 거론한 유일한 인물은 테무진의 둘째 아들이자 조치의 바로 밑 아우인 '차카타이'였다. 칭기스칸이 콰레즘제국과 한참 전쟁을 할 무렵, 작전회의 도중에 차카타이가 칭기스칸에게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왜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조치와 상의해라, 조치와 의논해라'라고 하십니까? 조치는 저 망할 놈의 메르키트의 후레자식인데." 그 자리에 있던 조치는 이성을 잃었다. 칭기스칸과 모든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조치와 차카타이는 멱살을 잡고 싸웠다.


그들이 그렇게 싸우는 동안, 칭기스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로 한 사람이 둘의 싸움을 뜯어 말리고는, 뼈에 사무치는 훈계를 했다. 이 사건은 훗날 몽골제국은 물론 세계사의 운명을 뒤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조치의 뒤를 이은 몽골제국의 지방정권 '조치 올로스(올로스는 나라라는 뜻)'는 성립 초기부터 몽골제국의 '아웃사이더'였다.


어거데이카간이 죽고나서, 가장 유력한 카간 후보 가운데 하나였던 조치의 둘째아들 바토(Batu)는 몽골 본토로 돌아오지도 않고 볼가강 근처에 눌러앉아 버렸다. 조치올로스를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몽골제국 절반에 가까운 영토와 카간에 대적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일인지 조치올로스는 제국 전체의 정국 운영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킹메이커가 된적은 있었지만 킹이 될려고 한적은 없었다.


콰레즘 원정이 끝나갈 무렵, 작전을 끝내고 칭기스칸과 합류하기로 약속한 날이 지났는데도 조치는 오지 않았다. 조치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조치에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던 걸까?. 조치 쪽 연락병이 도착했다. 조치의 사망 사실을 알렸다. 그래서 약속 시간에 늦었던 것이다. 어떤 학자는 칭기스칸이 제국 유지를 위해 조치를 암살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테무진이 칭기스칸이 되고 수많은 아내들을 거느리게 되었지만 버르테는 항상 예케 카톤(Yeke Khatun)이었다. 드라마 "태조 왕건" 식으로 말하면 '박상아'의 역할이라고 할까. 테무진은 조강지처에게 최선의 대우를 했다. 그는 허엘룬이 낳은 네 아들(조치, 차카타이, 어거데이, 톨로이)과 이들의 직계후손만이 제국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카간의 입후보 자격을 한정시킨 것이다. 어느 누가 감히 허엘룬을 우습게 볼까?


그럼 칭기스칸은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을까? 그렇게 봐야 하지 않을까. 테무진은 평생동안 조치를 큰아들로 대했다. 맏아들의 권위를 언제나 누렸고, 나라의 운명을 건 전쟁에서는 언제나 대규모 군단을 이끌며 중요한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어찌되었던 조치는 의심할 수 없는 칭기스칸의 장자였다.


칭기스칸은 몽골 통일 과정에서 조치에게 메르키트 정복 임무를 맡겼다. 조치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메르키트 정복 전쟁에서 조치는 포로가 된 한 적장에게 마음이 끌렸다. 조치는 적장의 마음을 돌려 휘하 장수로 삼고 싶었다. 조지는 칭기스칸에게 허락을 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때 칭기스칸은 조치에게 메르키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칭기스칸이 복수심에만 사로잡혔던 것 같지는 않다. 허엘룬이 훗날 메르키트 부족 아이를 양자로 들였는데 칭기스칸도 그 아이를 친자식과 다름없이 대했다고 하니 말이다.


"봉황의 높은 뜻을 잡새가 어찌 알리요"?


2001년 11월12일 세상에 나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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