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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시민의신문 기사

히로시마 평화공원 한켠 얻는데 30년 걸린 한국인희생자위령비

by betulo 2007.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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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평화공원 한켠에는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오른쪽 아래 사진)가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1970년 4월 10일 히로시마시 평화공원 밖에 건립된 한국인위령비가 평화공원 안으로 들어오는데만 3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니시모토 마사미 일본 츠고쿠신문사 편집위원은 “한국인위령비가 평화공원 밖에 있던 것을 민족차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이는 오해”라고 말한다. 니시모토 편집위원은 “애초 한국인위령비가 있던 곳은 조선 왕손이었던 이우를 구조했던 곳에 세운 것이며 민족차별과는 상관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원폭 당시 조선인 피폭자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도움을 제대로 못받았다고 하지만 그건 오해”라며 “당시에는 누구나 치료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니시모토 편집위원의 설명에 대해 김동렬 대구KYC 사무처장은 “진보적이고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니시모토 편집위원조차 재일동포 차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아쉬워했다. 한국인위령비를 둘러싼 논쟁에는 재일동포 차별이라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인 피폭자들이 피폭직후 치료과정에서 차별을 받았다는 내용이 <맨발의 겐>에도 생생히 묘사돼 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한국인위령비는 애초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에 건립할 예정이었고 히로시마시에서도 동의를 했다. 그러나 히로시마시는 ‘평화공원에 기념비나 위령비가 많기 때문에 공원 안에는 공작물을 허용하지 않는다’며 입장을 바꿔 버렸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위령비의 건립지가 구한국왕족이며 원폭으로 희생되었던 고 이우공 전하가 피폭된 유서 깊은 곳으로 확정하여’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위령비가 건립된 후에도 히로시마시는 평화공원에 새로운 위령비 7기를 허가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재일동포 뿐 아니라 양심적 일본인들은 한국인위령비를 평화공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운동을 계속했다. 특히 일본 학생들이 전국에서 엽서쓰기운동을 벌이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결국 1999년에 이전비를 민간에서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평화공원 안으로 한국인위령비를 옮길 수 있었다.

  

이실근 재일조선인피폭자연락협의회 회장에 따르면 괴한들이 희생자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시민들이 위령비 옆에 놓아둔 종이학들에 불을 지르거나 비문에 페인트를 던지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회장은 “범인이 잡힌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히로시마>라는 책을 쓴 이치바 준코에 따르면 1945년 7월부터 당시 히로시마 제2총사령부 참모부 제1과 교육참모로 근무하던 이우(대한제국 고종황제 둘째아들의 아들)는 말을 타고 출근하다가 피폭당했다.

 

그는 아이오이바시(相生橋) 부근에서 피폭되어 말에 탄 채로 하천에 굴러떨어졌고 하천을 따라 떠내려가 혼카와바시(本川橋) 곁에서 뭍으로 올라올 때 구조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1944년부터 중국 산시성 타이위안에서 근무하면서 조선독립군들과 접촉하고 있었고 일본은 이를 막기 위해 급히 이우를 히로시마로 보냈다고도 한다.

 

2005년 2월 4일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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