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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시민의신문 기사

[르포] 전시장에 갇힌 '반핵' 히로시마를 가다 (2005.2.4)

by betulo 2007.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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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시내를 둘러보면 이 도시가 과연 60년전 지옥같은 피폭 경험을 한 도시라는게 믿어지지 않는다. 히로시마는 어디를 둘러보나 잘 정돈되고 청결한 느낌을 준다. 양갓집 규수처럼 조용조용 소곤거리며 친철하게 대하는 시민들도 어두운 느낌은 전혀 없다.

평화기념자료관과 원폭돔, 평화공원 곳곳에 자리잡은 위령비를 접하고서야 비로소 이 도시가 평생토록 잊지 못할 상처를 안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평화자료관에서 히로시마가 지난 세기 일본에서 가장 번성한 군사도시였다는 걸 느끼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공원 한켠에 조용하게 자리잡고 있는 한국인위령비를 찾기 전까진 피폭 사망자 가운데 10% 가량이 조선인이었다는 것을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홀로코스트산업과 피폭자마케팅 히로시마는 과연 평화도시인가?

대구KYC가 주최한 히로시마 평화기행 내내 이런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요즘 몇해동안 부쩍 심해진 일본 우경화에 생각이 닿으면 의문은 더욱 깊어진다. 얼핏 일본 우경화 앞에 무력하기만 한 일본 시민사회를 생각하면 의문은 거의 단정에 이르게 된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안내 팜플렛 어디에도 ‘가해자 히로시마’는 없다. 오로지 ‘피해자 히로시마’가 있을 뿐이다. 짤막하게 소개된 군국주의화와 조선인 강제징용 등은 구색맞추기라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그나마 몇 년 전에는 그런 내용조차 없었다고 한다.

히로시마 평화공원과 자료관을 둘러보면서 느끼는 또 다른 의문은 일본국가라는 시스템이 ‘피폭’이라는 경험에서 오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체제 안으로 흡수해 ‘박제’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이용해 피해자 이미지를 확대재생산하는 것처럼 히로시마도 조선인 피폭자 문제는 덮어둔 채 자기들만 피해자인 양 하는 것은 아닌지. ‘홀로코스트 산업’에 빗대 ‘피폭피해자 마케팅’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평화기행에 참가한 우미정 KYC 사무처 간사도 같은 문제의식을 느꼈다. 그는 “반핵운동은 어떤 면에서는 반체제운동이 될 수도 있는 혁명적인 주제”라며 “현재적 의미 없이 기념만 하는 모습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그는 “평화기념자료관은 일본이 ‘대동아전쟁’으로 벌인 잘못이나 조선인 희생자 문제는 간략하고 딱딱하게 텍스트 위주로 설명해놓고 자신들의 피폭 경험은 이미지 중심으로 감정에 호소하도록 배치했다”며 ‘정치적 편파성’을 꼬집기도 했다. 

자기모순에 빠진 히로시마

그 자신 재일동포인 송승재 KEY(재일코리안청년연합) 회장은 “히로시마는 자기모순 속에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은 과거사에는 무관심하고 우경화는 나날이 극심해진다”며 “강제징용이나 조선인피폭자 문제는 신경도 안쓰고 일본인납치자 문제에는 나라 전체가 들썩이는 걸 보면 암담하다는 생각밖에 안든다”고 털어놨다. 송 회장은 “가해는 기억하지 않고 피해만 기억하도록 함으로써 피폭이라는 기억을 체제 속에 포섭해 버린다”고 비판했다.

이실근 재일조선인피폭자연락협의회 회장은 히로시마의 자기모순을 더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그는 “1894년 일본군대가 청일전쟁을 위해 조선으로 출발한 기지가 히로시마였다”며 “히로시마는 그저 단순한 원폭 피해지이자 국제적으로 유명한 평화도시가 아니라 죄없는 인류를 학살하는 출발지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1894년 10월 5일 명치천황은 히로시마를 군사도시로 설정하고 히로시마항을 군항으로 설정했다”며 “그때부터 일본 최대 군사도시가 된 히로시마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철저한 가해자”라고 강조한다.

이 회장은 “일본인들은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만 강조하지만 그럼 일본은 원폭 투하 이전까지 평화롭게 조용히 살고 있었다는 말이냐”고 물은 뒤 “원폭 투하 최대 원인은 전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 아시아의 많은 사람들이 원자폭탄 잘 떨어졌다고 한 이유를 잘 알아야 한다”며 “결국 지난 세기 아시아에 일본이 많은 피해를 끼치고도 반성을 안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은 과연 얼마나 떳떳한가 

그런 히로시마가 “일본에선 그나마 진보적인 도시”라는 점은 역설적이다. 송승재 회장은 “매년 원폭투하 기념행사 때마다 히로시마 시장은 원폭실험 등 원폭과 관련한 호소문을 발표한다”며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고 말했다. 원폭피해 경험을 가진 히로시마시민들은 타지역 일본인에 비해 확실히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이 강렬하다는 것이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도 히로시마시 예산으로 관리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든다. 한국은 과연 얼마나 떳떳한가. 일부를 빼고는 한국 시민사회도 월남전쟁에 대해 무관심하다. 한국정부는 이라크에 세계 세 번째 규모로 큰 부대를 파병했다. 일제시대 친일반민족행위도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학살도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진열장 안에 갇힌 ‘박제’가 아닌 살아움직이는 ‘반핵’, 피해가 아니라 가해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평화’. ‘세계적으로 유명한 평화도시 히로시마’를 둘러보며 앞으로 한국에 들어설 평화공원, 평화박물관에 가장 먼저 필요한 건 결국 자신의 잘못도 드러내고 미래를 응시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폭 생생함 반핵교과서 나카자와가 그린 ‘멘발의 겐

대구 KYC는 지난달 24일부터 28일까지 히로시마 평화기행을 준비하면서 <맨발의 겐>(오른쪽 아래 사진) 이라는 만화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특이한 참가자격을 내걸었다.

사실 <맨발의 겐>만큼 원자탄 투하 참사와 피해자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그 자신이 원폭 피해자인 작가 나카자와 케이지는 <맨발의 겐>을 통해 피폭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화상으로 온몸이 녹아내린 사람들, 무너진 건물에 깔려죽은 사람들, 구호활동을 하다 그 자신 방사능에 노출돼는 사람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원폭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과 참담함이 눈에 선하는 점에서 <맨발의 겐>은 최고의 반핵교과서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또한 이 책은 특히 군국주의를 고발하고 조선인을 비롯한 외국인을 차별하는 일본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사죄할 줄 모르는 일본’의 반대쪽에 서있다.

한자어로 元으로 쓰는 주인공 겐은 원소의 원, 원기의 원, 인간의 근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이다. ‘맨발’은 맨발로 원자폭탄이 휩쓸고 간 대지를 굳세게 밟고 다닌다는 이미지를 상징한다. 지은이는 “두 번 다시 전쟁과 핵무기를 요납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아 제목을 <맨발의 겐>으로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지은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질 때 중심지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초등학교 뒷문에 있었다. 그를 구해준 것은 학교의 콘크리트 담장이었다. 지은이는 “이 담장에 붙어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새까맣게 타면서 녹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회상한다. 지은이는 피폭으로 인해 아버지, 누나, 동생을 잃었으며 어머니도 원폭병원에서 7년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1966년 사망했다.

나카자와 케이지가 1973년부터 <주간 소년점프>에 연재한 <맨발의 겐>은 일본 뿐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는 등 큰 인기를 누렸다. 영화(1976), 오페라(1981), 애니메이션(1987), CD롬(1999)으로 제작되었다. 

나카자와 케이지 글․그림/ 김송이․이종욱 옮김/ 아름드리미디어/각권 5600원 

2005년 2월 4일 오전 3시 12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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