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났던, 그 모든 순간들>

환빠논쟁, 대통령이 묻고 뉴라이트가 답하다

betulo 2025. 12. 14.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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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던, 그 모든 순간들 008>

  책이란 많이 읽는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엉뚱한 책 잘못 읽었다가 오랫동안 오해와 착각 속에 빠질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여러 책을 두루 읽으며 다양한 관점을 비교하면서 자기 관점을 정립하지 않고 한가지 책에 너무 빠져 버릴 때 발생한다. 대통령 이재명이 촉발시킨 난데없는 ‘환빠논쟁’이 딱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지난 12일 업무보고에서 이재명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박지향에게 ‘환빠논쟁’을 물었다. 이재명은 "역사교육과 관련해 무슨 '환빠 논쟁' 있지 않으냐... 환단고기를 주장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보고 비하해서 환빠라고 부르잖느냐. 고대 역사 부분에 대한 연구를 놓고 지금 다툼이 벌어지는 것이잖느냐"고 말했다. 

  박지향은 "역사는 사료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문헌 사료를 저희는 중시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이재명은 “환단고기는 문헌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고, “결국 역사를 어떤 시각에서, 어떤 입장에서 볼지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며 "고민거리"라고 말했다.(여기를 참조

  이 짧은 대화에서 눈여겨 본 건 세 가지였다. 이재명은 환단고기 문제를 ‘논쟁’, 그러니까 서로 다른 두가지 관점 사이의 토론 정도로 인식한다는 걸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명은 과도한 의견표명을 자제한 덕분에 최악의 수렁에 빠지진 않았다. 하필이면 이 문제에 대답을 한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본인이 ‘뉴라이트’의 대표주자 가운데 한 명이다보니 애초에 논쟁이 뒤죽박죽이 돼 버린 건 매우 안타까운 노릇이다.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에선 강한 어조로 이재명을 비판했는데, 가령 국힘 원내수석부대표 김은혜는 페이스북에 “사이비 역사를 검증 가능한 역사로 주장할 때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대통령이 환단고기를 관점의 차이라고 하는 건 백설공주가 실존 인물이라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국힘 대표를 역임했던 한동훈은 “논란이 아닌 것을 의미 있는 논란이 있는 것처럼 억지로 만들어 혼란을 일으킨 무지와 경박함이 문제”라고 했고, 개혁신당 대표 이준석은 “환단고기가 역사라면 ‘반제의 제왕’도 역사”라고 말했다. 

  진영논리가 모든 것을 뒤덮어버린 게 요즘 세태다. 그러다보니 맞는 말을 해도 발언자가 저쪽 진영이면 틀린 말이 돼 버리고, 틀린 말을 해도 발언자가 우리 진영이면 변명해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윤석열이 한 말이라도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면 수긍을 해줘야 한다. 김일성이 아무리 미워도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를 가진 자랑스런 민족입니다’라는 말까지 부정할 순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재명이 촉발한 환빠 ’논쟁’에 관한 한, 한동훈이나 이준석이 한 말이 맞다.

  이쯤에서 고백해야겠다. 환단고기가 한창 베스트셀러로 팔리던 무렵 나도 그 책을 읽었다. 격한 감동을 받았다. 그 뒤로 몇 번이나 환단고기를 읽고 또 읽었다. 밑줄을 긋고 형광펜을 칠하며 읽었다. 지금도 책꽂이에 그 때 읽던 환단고기가 꽂혀 있다. 물론 용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한창 환단고기 읽을 때는 고대사 ‘문헌’이었지만 지금은 한국현대사 자료다. 우울하고 분노에 차 있던 젊은이들을 현혹했던 찌라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문제가 ‘이재명 나빠요’로 단순하게 귀결되느냐 하면, 그럴리가 없다. 사실 국힘이 배출한 두 전직 대통령 윤석열과 박근혜야말로 환단고기로 평지풍파를 일으켰던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먼저 윤석열을 보자. 202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윤석열은 자칭 건진법사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당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건진이 주변에 만들어준다는 부적은 한눈에 봐도 ‘천부경(天符經)’ 81글자를 붉은색으로 써놓은 것이었다.(출처는 여기)

  천부경은 환단고기에 실려 있다. 환단고기는 1911년에 계연수라는 사람이 편집했다고 하는데, 정작 천부경은 계연수가 1916년 묘향산 암벽에서 찾아내 탁본을 하면서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1911년에 편집한 책에 들어있는 걸 어떻게 1916년에 암벽에서 찾아냈다는 것일까. 거기서부터 도대체 앞뒤가 맞질 않는다. (환단고기 신봉자들과 고대사 시각이 매우 유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묘향산에서 천부경을 찾아내 발표하지 않는 건 또 무슨 조화인지 모를 일이다.)

  천부경이란 이미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믿을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가 ‘조선사연구초’(1929)에서 “역사를 연구하려면 사적 재료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지라…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왕검의 성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때 천부경을 경전으로 떠받드는 대종교에 몸담았던 신채호조차 이 정도였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박근혜는 한 술 더 떴다. 박근혜는 2013년 광복절 축사에서 환단고기를 인용해 역사학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트렸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원문은 여기) 사실 이 구절은 독립운동가 박은식이 '한국통사'(1915)에서 쓴 "대개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다. 지금 한국의 형은 허물어졌으나 신만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를 본딴 것으로 보는데, 이것이야말로 '환단고기'가 20세기 창작물이라는 유력한 역사학적 근거가 된다.(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이쯤되면 환단고기에 관한 한 여야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냐 하실 분이 있을 텐데, 사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가령 2015년 3월 더불어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도종환은 동북아 역사지도에서 2세기 고구려 국경선 위치가 중국에서 만든 만든 중국 역사지도집과 완전히 똑같다고 주장(동북아역사재단 추진 역사지도, 중 ‘동북공정’ 지도 베끼기 의혹)했고, 그 해 11월에는 낙랑군의 위치 표기가 “식민사학의 논리와 똑같다”고 비판했다(여기).(도종환이 언제부터 고대사 전공자가 됐는지는 재론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위대한 고대사’에 관한 한 여야가 다르지 않고 진보와 보수가 다르지 않은가. 교보문고에 가서 책꽂이에 꽂혀 있는 고대사 책만 대략 훑어봐도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거나 ‘한민족 1만년 역사’ 더 나아가 ‘고대 수메르는 우리 민족이었다’ 같은 주장을 펴는 책들이 수두룩하다. 역사에 관심이 많다는 사람 가운데 적잖은 분들이 이런 주장에 공감하거나 동조하는 것도 많이 봤다.

환단고기에 따른 '우리' 문명권. 기왕이면 아프리카랑 호주, 그리고 달나라와 화성도 포함시켜줬더라면 좋았겠다. 이렇게 배포가 작아서야 어찌 큰 일을 도모할까 싶다.

  환단고기가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도 그렇고, 환단고기에서 기쁨과 희열을 느끼는 (그 시절의 나같은) 사람들에겐 공통된 정서가 있다. 부동산이다. 환단고기는 헬조선의 근본 원인을 ‘우리나라가 땅이 좁아서’라고 강조한다. 한국이 중국이나 러시아 정도 영토는 가져야 호연지기를 갖는 국민이 된다는 생각을 버리질 못한다. 틈만 나면 광활한 만주벌판 타령이고 치우천황이니 연개소문이 중국을 박살 내고 중국 땅을 정복했다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군사독재에 지치고 사회의 부조리와 비루함에 좌절하던 이들이 '그래 우리도 한때는 위대한 민족이었더'라는 '깨달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그건 그냥 '지금 우리는 달동네에서 찌질하게 살지만,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는 만석꾼이었다'는 열등감에 불과했다.

  어떤 분들은 환단고기니 천부경이니 다 ‘논쟁’의 영역에 있는 것이고, 다양한 학설 가운데 하나이니 ‘취향 존중’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이재명 발언이 논란이 되자 대통령실이 내놓은 해명도 그런 취지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유대인들이 세계정복을 꿈꾸고 있다는 괴문서가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임나일본부설을 어떤 식으로 퍼뜨렸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조작하는 건 따지고 보면 현실을 조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유사역사학이 위험한 건 단순한 옆길로 새버린 역사 마니아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이 지극히 위험하고 퇴행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올바른 역사관이란 이름으로 다양성과 토론조차 인정하지 않는 파시즘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환단고기를 적극적으로 알리던 사람의 책을 육군사관학교 교재로 사용한 건 전두환 정부였다. 

  또 어떤 분들은, ‘강단사학’은 식민사학의 후예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입만 열면 식민사학의 후예를 비판하는 이덕일은 숭실대에서 동북항일연군(이른바 조선인민혁명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럼 이덕일도 강단사학의 후예인가? 한사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하면 식민사관이라고 비난하는데, 그럼 <아방강역고>에서 “한사군은 지금의 평양”이라고 논증했던 다산 정약용도 식민사학자인가.

환단고기의 부동산지상주의에 따른 자학사관.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영토'가 쪼그라든다.

  역사공부가 즐거운 것은 ‘우리 조상은 위대했다’거나 ‘우리 조상들은 넓은 부동산 가진 땅부자였다’는 걸 발견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조상님들이 찌질했다면 또 어떻고 대단한 벼슬을 했으면 또 어떤가. 그런 게 중요한가?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해외 부동산 투기를 청동기시대까지 확장하는 땅따먹기 놀이를 위해서도 아니다. 

  대한민국은 반도 구석에 쳐박힌 달동네도 아니고 찌질한 나라도 아니다. 우리는 굳이 천부경이나 환단고기 같은 짝퉁이 없어도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는 국민들이다. 우리는 총 한 자루 없이도 우주의 기운이 충만했던 대통령과 자신이 부정선거로 당선됐다고 믿으며 날마다 술만 쳐먹던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낸 자랑스런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에겐 더이상 환단고기도 필요없고 그걸로 논쟁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필요도 없다. 세상엔 환단고기보다 훨씬 더 재밌는 소설이 정말 많다. 

기존에 블로그에 썼던 여러 글을 대폭 수정보완했다. 
윤석열 절친의 '천부경' 부적
이덕일의 '정신승리 사관'과 과대망상 어디까지 갈 것인가
역사왜곡에 예산지원하는 나라
'조선구마사'를 통해 역사왜곡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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