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說

분노 과잉 시대 단상

betulo 2025. 7. 3.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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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대표팀에서도 뛰었던 기성용이란 선수가 있다. 최근에 기성용이 소속팀인 FC서울을 떠나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한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축구팬들 사이에서 엄청난 논란이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기성용은 유럽에서 뛸 때를 빼고는 줄곧 서울에서 뛰었던 이른바 ‘레전드’였고, 기성용을 내보낸 감독 김기동은 올해 처음 부임했다. ‘굴러온 돌이 기성용을 쫓아냈다’는 목소리가 서울 열성팬들 중심으로 울려퍼졌다. 지난 주말인 6월 29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프로축구 K리그 서울과 포항 경기가 열리니 이래저래 분위기가 폭발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경기가 열렸던 서울월드컵경기장 분위기는 여러모로 특이했다. 경기 전부터 ‘레전드’를 존중하지 않는 서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응원석에는 김기동을 비난하는 걸개그림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중계화면에 김기동의 모습이 잡힐 때마다 야유가 쏟아졌다. 경기 내내 틈날 때마다 “김기동 나가!”라는 팬들의 구호가 끊이지 않았다. 정작 서울은 올 시즌 들어 가장 좋은 경기를 했다. 포항을 4-1로 꺾으며 대승을 거뒀다. 그럼에도 김기동은 웃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급기야 경기를 마친 뒤 서울 팬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선수들이 탄 버스를 한 시간 가량 가로막고 항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소동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여러모로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어떤 특정한 현상을 압축해서 보여준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기 때문이다. 이걸 뭘로 표현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거칠게나마 먼저 떠오른 말이 ‘분노 과잉 시대’였다. 어딜 둘러봐도 사람들은 화가 많이 나 있다. 대한민국에서 화병에 걸린 사람, 화병에 걸렸다는 사람, 화병에 걸릴 것 같다는 사람 찾는 건 너무나 쉽다. 

당장 일요일 오전에 광화문 네거리에 가보면 화를 참지 못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온갖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이 떼거지로 모여있다. 심지어 그 집회에서 가장 화가 많이 나 있는 사람은 (자칭) 목사님이다.

한국은 어쩌다 이렇게 “불만에 찬 시민”이 넘쳐나는 곳이 됐을까. 그 원인까지 따질 깜냥은 안되지만 다만 꼭 토론해보고 싶은 주제는 분노가 넘쳐나는 와중에 ‘존중’이라는 가치까지 외면받는 세태가 아닐까 싶다. 거칠게 표현해보면 ‘분노 과잉 시대’ 속 ‘존중 부족 사회’다.

지금은 이름을 민주노동당으로 바꿨다는 정의당에 오만 정이 다 떨어졌던 건 2022년에 의원 5명에게 총사퇴를 권고하는 당원 총투표를 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국회의원이란 존재를 그냥 몇 달 시켜보고 언제라도 쫓아내도 되는 계약직 직원처럼 생각하는구나, 정치에서도 숙련노동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구나 싶었다. 과연 다른 거대정당들은 정의당과 얼마나 다른 모습일까.

위에서 언급한 FC서울만 해도 팬들은 ‘레전드’를 존중하지 않는다며 거세게 항의하지만, 막상 선수들을 지휘하는 감독을 존중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치 팬덤들은 ‘직접민주주의’라는 실체가 불분명한 구호를 외치며 정치인의 전문성을 간단하게 무시해 버린다. 선거 부정론자들은 선거 관련 경험이 많은 사람들 얘기를 듣지 않고, 자신들을 재야 사학이라 주장하는 유사 역사학 신봉자들은 수십 년 역사 연구에 매진한 학자들을 속 편하게 ‘식민사학 후예’라고 매도해 버린다.

온 사회가 인공지능을 말한다. 혁신적인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외친다. 하지만 숙련노동의 가치를 존중해주지 않는데 숙련된 전문인력은 어느 세월에 육성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숙련노동에서 우러나는 통찰력에 제대로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면 육성은 해서 뭐할 것인가. 이제는 서로 서로 화를 좀 가라앉히고 상대방의 자부심을 조금씩이라도 존중해주는 게 국민건강을 위해서라도 시급하지 않을까 싶다.

 

인권연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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