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뭐 하나 예쁜 구석이 없었다
<처음 만났던, 그 모든 순간들 002>
런던은 첫인상부터 시작해 일관성 있게 나를 실망시켰다. 처음엔 당황하게 만들고 그 다음은 짜증나게 했고 마지막엔 분노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영국 런던에 머문 시간은 일주일이었지만 참 알차게도 갖가지 악몽을 나에게 선사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9시 13분 출발한 유로스타 기차는 10시 34분 런던에 도착했다. 유로스타는 꽤 쾌적했다. 파리에서 런던까지 두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2011년 6월이었다. 특이했던 건, 기차를 타기 전에 출입국심사를 했다. 유럽에 처음 도착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여권에 입국심사 도장을 찍은 뒤 독일과 프랑스를 거치는 동안엔 출입국심사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게 유럽의 힘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영국은 셍겐조약 당사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출입국 절차를 따로 해야 했다.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 내린 뒤 다시 입국 도장을 찍었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대영제국의 후예 영국, 심정적으로 비호감인 나라가 온 몸으로 비호감으로 찍히는 데 필요한 시간은 채 30분이 안 걸렸다. 런던 지하철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차례대로 당황, 짜증, 분노가 휘몰아친다. 무거운 캐리어 들고 지하철에 들어섰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다. 에스컬레이터도 없다. 캐리어를 질질 끌며 계단을 이리저리 오르락 내리락 했다. 안내판도 제대로 돼 있지 않아서 어두침침한 지하철 통로를 이리저리 헤매야 했다.
지하철은 턱이 높아서 캐리어가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어두침침하고 지저분한 분위기는 (과장해서 말한다면) 영화 메트릭스 1편에 나오는 지하철역같은 느낌이었다. 심지어 지하철 요금 영수증을 보니 6파운드라고 돼 있다. 대충 계산해도 1만원이 넘는다. 런던 직전에 들렀던 파리에선 5장, 베를린에선 열흘 무제한 이용권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런던 공공요금은 정말 악 소리났다.(그런데 런던에 '공공'요금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런던에 간 건 어디까지나 출장 때문이었다. 그래도 주말 하루는 자유시간이었다. 주저없이 워털루역을 선택했다. 영화 '본 얼티메이텀'에서 주인공 제이슨 본이 워털루역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장면이 기억에 생생했다. 그 현장을 느껴보고 싶었다. 워털루역 다음에는 영화 ‘유리의 성’에 나오는 웨스터민스터 다리를 건너서 대영제국의 상징인 웨스터민스터를 둘러볼 계획이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워털루역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건 화장실이었다. 그 큰 역에 공용 화장실이 딱 한군데 있는데 그게 30페니씩 내고 써야 하는 유료라고 써 있었다. 동전 교환기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하철 개찰구처럼 돼 있는 유료화장실 출입구를 돈도 안내고 지나다니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동전투입구에 <OUT OF SERVICE>라고 써 있다. 30페니 내라는 건 공공장소 화장실마저 공공성을 포기해 버리는 비극, 그리고 그마저도 제대로 작동을 못해 모양만 우스워지는 희극이 교차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지하철은 너무나 불편했고 멋모르고 탄 택시는 너무 비싸서 충격을 받았다. 더 끔찍했던 건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불량학생들한테 봉변을 당한 일이었다. 지하철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몰려와선 나를 둘러싸고 시비를 걸었다. 이역만리에서 객사할 순 없는 노릇이다. 눈을 꿈벅꿈벅하며 못 알아듣는 척 딴청을 부렸다. 다행히 얼마 안돼 “I hate you”라는 말을 남긴 채 자기들 갈 길을 갔다. 내가 밉단다. 응 나도 너네 나라 미워졌어.
그것 말고도 런던은 비호감으로 가득했다. 호텔은 예약할 때 금연이라고 분명히 얘기했건만 담배 냄새 쩌든 방을 내주고, 그나마 느려터진 인터넷을 하루에 12.5파운드 내라고 한다. 마음에 안들려니 자동차들이 왼쪽으로 다니는 것도 꼴보기 싫어진다. 날씨 꾸질꾸질한 것도 불쾌하다. 음식이 맛이 없는 건 애초에 기대가 없었으니 실망도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간 피시앤칩스 식당은 대학 시절 학생식당에서 먹었던 생선까스보다도 맛이 없었다. 물론 학생식당 생선까스보다 값은 10배 이상 비쌌다.
당시 지인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난 이렇게 썼다.
"여기 날씨는 듣던 것보다 조금 더 구질구질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상당히 싫어하는 우중충한 날씨군요. 어제는 잠깐 시간이 나서 웨스트민스터 구경이라도 해볼까 해서 길을 나섰다가 쏟아지는 비에 신발만 다 젖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우산을 챙긴 게 천만다행입니다.”
런던 경험을 마칠 즈음 ‘유럽은 피레네 산맥에서 끝난다’는 말이 떠올랐다. 프랑코가 독재자로 스페인을 지배하던 시절 유럽에서 스페인을 비판하는 표현이었다고 한다. 피레네 산맥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을 가르는 국경선이었다. 그걸 살짝 바꿔서 ‘유럽은 도버해협에서 끝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런던에 갔던 2011년 6월 이후 정확히 5년 뒤 영국은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며 도버해협을 경계로 유럽이 끝나도록 만들어 버렸다.
1주일 동안 런던에 머물면서 그나마 유일하게 눈호강을 했던 건 샤이니 쇼케이스였다. 런던 출장 기간이 마침 아이돌그룹 샤이니가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쇼케이스를 하는 일정과 겹친 덕분에 생긴 횡재였다. 이날 공연은 샤이니가 일본 EMI뮤직 재팬과 계약을 맺고 일본에 데뷔한 것을 기념하는 사전 프로모션 차원에서 열린 행사였다. 애비로드 스튜디오는 1960년대 비틀스가 녹음한 곳이자, 이들의 앨범인 ‘애비로드’의 재킷 사진에 등장해 유명해진 곳이다. 쇼케이스보다도 더 놀라웠던 건 애비로드 주변을 가득 메운 유럽 소녀팬들이었다. 수천명은 몰려오는 바람에 급작스럽게 경찰이 출동하고 난리가 났다.
당시만 해도 많은 이들이 어리둥절했다. 유럽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조차 회의적인 시선으로 ‘저러다 말겠지’ 하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애비로드 주변 도로를 가득 메워버린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소녀팬들은 10여년 뒤 K팝의 인기를 예고하는 징조였다. 사실 영국에서 K팝 동호회가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한 게 2006년 무렵이었다. 샤이니가 쇼케이스를 하기 넉 달 전 영국 주재 한국문화원이 주최한 ‘K팝의 밤’ 행사는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도 620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