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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6

남북과 50년 인연 몽골인 석학이 말하는 한반도 평화의 길 “한국이 명확한 전략과 기민한 전술로 한반도, 더 나아가 동북아 평화를 주도하길 바랍니다.” 몽골 외교관으로 서울과 평양에서 20년 근무하는 등 한반도와 50년 넘는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바산자브 락바(76) 전 몽골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연구원 고문은 인터뷰에서 “당장은 남북간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지만 정세는 변하기 마련”이라며 한국의 적극적인 전략수립과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락바는 1974년부터 1982년까진 평양 주재 몽골대사관, 1997~2004년과 2006~2009년에는 주한몽골대사관에서 근무했다. 2015년에 ‘한반도평화통일연대 몽골 포럼’을 창설해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그는 “정전 70주년은 곧 분단 70주년이라는 걸 의미한다”고 짚었다. 그는 “특히 요즘은 남북 사이에 .. 2023. 7. 26.
천연두·콜레라·독감… 역사가 바뀐 현장엔 전염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해인 1593년 3월 남해안 일대에 전염병이 번졌다. 이순신 역시 12일간 고통을 겪어야 했다. 좁은 배 안에서 함께 생활하던 조선 수군에선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전투 중 전사자보다 몇 배 더 많았다. 1594년 4월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를 보면 전염병 사망자가 1904명, 감염자는 3759명으로 전체 병력 2만 1500명의 40%가량이 전투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다시 전염병이 창궐한 1595년 수군 병력은 4109명까지 감소했다(나승학. 2017). 당시 이순신이 전염병에 쓰러졌다면 임진왜란은 어떻게 끝났을까? 숙종 10년(1683) 숙종이 천연두에 걸렸다. 첫 부인인 인경왕후 김씨를 천연두로 잃은 숙종을 살리기 위해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 2020. 2. 7.
<성무친정록> 칭기스칸 연대기 원문 《聖武親征錄》 序 『聖武親征錄』一書, 乾隆間, 修四庫書時, 以其序述無法, 詞頗蹇澀譯語互異, 未著於錄, 僅存其目於史部雜史類中, 錢竹汀先生始表章其書, 爲之跋尾, 道光以後後學者頗治遼金元三史及西北地理. 此書亦漸重於世. 張石洲․何願船二先生始爲之校勘, 而何氏治之尤勤. 其歿後, 稿本流傳京師. 光緖朝士若順德李仲約侍郞, 萍鄕文道希學士, 嘉興沈子培先生, 遞有增益, 歲在甲午桐盧袁重黎太常刊之於蕪湖, 是爲此書, 有刊本之始顧張何二家所據本雖云出竹汀先生家, 然輾轉傳鈔謬誤百出, 石洲僅得翁覃谿學士家藏本一校之無大懸絶也. 余前在海上, 於嘉興沈先生座上見其所校『說郛本親征錄』, 爲明弘治舊鈔與「何本」異同甚多. 先【2쪽】生晩歲不甚談元史事然於「說郛本」猶鄭重手校未幾先生歸道山其校本遂不可見. 比來京師膠州柯鳳孫學士爲余言元太祖初起時之十三翼, 今本親征錄不具「說.. 2011. 8. 22.
우물 안 한국, 잘못된 외래어 표기법 넘쳐난다 오는 26일 시작되는 메카 성지순례를 앞두고 벌써부터 무슬림 수백만명이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로 메카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무슬림들에게 메카 성지순례는 일생에 한 번은 해야 하는 신성한 의무라고 하네요. 앗 살람 알라이쿰. 메카 성지순례를 가리키는 말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습니다. 위키백과(http://ko.wikipedia.org/wiki/%ED%95%98%EC%A6%88)에는 “하즈(아랍어: حج)는 메카의 성지를 순례하며 종교적 의례에 참가하는 일로 모든 이슬람 교도에게 부과된 기본적인 종교 의무 중 하나이다. 정규적인 순례를 마친 자를 '하지'(الحجّي)라고 부른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자료나 국내언론보도에는 ‘하지’라고 돼 있네요. 어느 쪽이 맞는 걸까요? 황병하 조선대 아랍어과 교.. 2009. 11. 18.
자다(Jada) - 날씨를 내맘대로 1232년 1월 당시 금나라의 서울인 개봉의 서남쪽 삼봉산(三峰山). 이 곳에서 몽골군과 15만의 금나라군이 나라의 운명을 걸고 맞붙었다. 몽골군 총사령관은 칭기스칸의 막내아들 톨로이(Tolui). 금나라는 완안합달(完顔哈達)이었다. 당시 몽골군의 병력은 1만 3천이라고도 하고, 4만이라고도 한다. 몽골군은 참호를 파고 말과 몸을 숨겼다. 계속된 폭설로 세상은 온통 눈으로 뒤덮였다. 금나라 군대는 사력을 다해 공격을 거듭했지만 큰 타격을 입히지도 못한 채 추위와 허기로 급격히 전력이 약해져 버렸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몽골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금나라의 최정예 부대는 전멸했다. 금나라는 저항할 힘조차 잃어버렸다. 왜 톨로이는 참호를 파고 말과 몸을 숨기는 작전을 썼을까? 기병전은 참호전과는 영 어울리지.. 2007. 7. 21.
코릴타(쿠릴타이)의 기원 흔히 쿠릴타이로 알려져 있는 몽골제국의 코릴타는 흉노이래 북방민족의 역사에서 계속해서 보인다. 그 최초의 예는 오환(烏桓)과 선비(鮮卑)이다. 오환은 "마땅히 용감하고 건장하며, 판결을 다투거나 서로 침범하는 문제를 이치에 맞게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추대하여 대인(yeke hun)으로 세우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선비제국을 건설했던 단석괴도 "온 부락이 두려워 복종"하고 "법을 엄하게 시행하고 이치의 옳고 그름을 바로 했는데, 감히 어기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위치를 가진 후에 "대인으로 추대"되었다. 이와 같은 기록은 오환과 선비에서 칸을 선출하는 회의를 했다는 것과 부족간의 분쟁을 공평하게 해결하고 전쟁을 잘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을 칸으로 선출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유라시아 동반부에서 최초로 .. 2007.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