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만사형통 극락왕생 사찰쇼핑몰을 걷다
<처음 만났던, 그 모든 순간들 005>
초등학교 소풍이란 김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소풍 하루 전날이면 어머니는 큼지막한 소세지와 단무지를 사다가 김밥을 만들어주셨다. 당시 소풍 가는 곳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자그만 절이었다. 그러므로 김밥이란 1년에 봄가을 1년에 두 번 먹을 수 있는 귀한 먹을거리였고, 절이란 귀한 김밥을 먹는 곳이었다.
잿밥에만 관심 갖던 절이란 곳은 대학 시절 꽤 고상한 이미지로 변했다. 사학과에선 1년에 두 번씩 전국에 있는 역사유적을 찾아가는 답사를 갔다. 교수님도 모시고 1학년부터 졸업을 앞둔 복학생까지 참여하는 꽤 큰 행사였다. 아무래도 천년고찰을 방문할 일이 많았다. 지리산 화엄사와 천은사, 여수 향일암, 문경 봉암사, 화성 용주사, 예산 수덕사처럼 이름꽤나 있는 절집을 가봤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절 해우소는 너무 노골적인 친환경 푸세식이라 키득거리며 감상했고, 사학과 다니던 학생치고 F학점 안맞아본 적 없는 어느 교수님이 수업교재로 쓰는 바람에 이를 갈았던 문경 봉암사 지증국사탑비는 오히려 미운 정으로 바라봤다. 합천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보다도 해질녘 스님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힘차게 두드리던 법고(法鼓)와 목어(木魚) 소리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절집이란 산을 뒷배로 자리잡은 곳이 태반이라 경치가 끝내줬고, 천년 묵은 향기 또한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여운이 많이 남는 곳은 폐사, 건물터나 탑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옛 절터였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지금도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 해가 늬엿늬엿 질 때 산허리에 지는 해가 걸리고 노을이 질 때 고즈넉한 당간지주나 석탑을 거닐다보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이런건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한결같이 나고 변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절이 예쁘니 스님들도 멋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미지가 깨진 건 2007년이었다. 그 해 가을 신정아 학력위조 사건이 어느덧 변양균의 특혜의혹으로 번졌다. 사태가 어쩌다 그렇게 흘러갔는지 뒷배경이야 보고 들은 게 많긴 하지만, 어쨌든 당시 템플스테이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단독기사를 썼다. 템플스테이는 지금이야 불교예산이라기보다는 힐링과 K컬처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갖게 됐지만 사실 시작은 꼭 그렇진 않았다. 애초에 정부가 템플스테이에 예산지원을 시작한 건 2002 한일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숙박시설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만 해도 조계종에선 ‘우리가 여관업주냐’며 꽤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랬던 것이 어느덧 수백억대 정부예산지원을 받게 됐고, 자연스레 조계종 안에서 템플스테이 예산확보를 위한 경쟁이 격해지고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는 게 기사의 취지였다.
그 기사 덕분인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님과 악수를 해봤다. 맞다. 합장이 아니라 악수를 했다. 기사가 나오고 조계종에서 항의방문을 왔는데, 꽤 긴장된 분위기였다. 어쨌든 딱 하나 기억나는 건, 그 스님 아귀힘이 꽤 쎘다.
북한산에 자리잡은 천년사찰 도선사를 취재 때문에 가본 적이 있다. 우이구곡 복원행사 취재 때문이었다. 우이구곡은 북한산 도선사 올라가는 길옆으로 길게 이어진 계곡인데, 조선 후기 대제학을 지냈던 홍양호가 1762년 무렵 골짜기 아래쪽 재간정부터 올라가기 시작해 현재 도선사 바로 아래에 있는 만경폭까지 9곳을 선정한 게 계기가 됐다고 한다.
빼어난 자연경관을 간직한 명소인데, 1950년대 도선사가 늘어나는 신도들이 마실 물을 확보한다며 무단으로 우이구곡 가운데 하나인 만경폭 위에 콘크리트를 발라 보를 만들면서 흉물이 돼 버렸다. 도선사를 찾은 2018년 12월에 서울시와 강북구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우이구곡 복원 착공식이 열렸고, 지금은 원래 모습이 복원됐다고 들었다. 불교가 ‘자연과 어우러진 친환경’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하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흉물스럽던 만경폭이 떠올라 묘한 기분이 든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 짬을 내서 도선사를 둘러봤다. 과연 천년고찰이었다. 대웅전 뒷편으로 우뚝 솟은 북한산 봉우리가 한 눈에 보이고 대웅전에서 앞을 바라보면 북한산 산줄기가 거칠 것 것 없이 이어진다. 절 곳곳에 자리잡은 멋드러진 소나무는 눈을 시원하게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아름다운 광경을 압도해버리는 건 절 곳곳에 자리잡은 복전함이었다.
도대체 몇개나 되는지 궁금해서 하나씩 세보기 시작했다. 스물 언저리에서 포기했다. 각종 현수막 내용 역시 하나같이 불사, 불사, 불사… 신앙심이 얕은 중생 눈에는 그저 ‘돈내세요 돈내세요 돈내세요’로 보일 뿐이다. 도선사에서 팔던 화분은 또 어떤가. 합격을 기원한다는 ‘합격화’가 1만 원,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행복화’가 5,000원이란다. 아마도 지금은 만사형통 비용이 더 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강화도 서쪽에 자리잡은 석모도에는 관음신앙으로 유명한 보문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곳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봤다. 보문사 뒷편에는 큼지막한 마애석불이 있는데 낙조가 꽤나 멋지다. 몇 해 전 가족여행으로 석모도를 가는 길에 보문사에 들렀다. 거기서 내가 본 것은 관세음보살도 아니고 고즈넉한 천년사찰도 아니었다. 만사형통 건강장수를 파는 쇼핑몰이 있었다.
보문사 앞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다. 주차비는 2,000원이다. 식당과 커피숍이 즐비한 ‘먹자골목’을 걸어서 올라가면 일주문이 나온다. 성인 2,000원. 돈 없으면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할 생각하면 안된다. 거기까진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너무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건 보문사 입장에서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보문사 경내에서 가장 눈을 어지럽히는 건 돈을 내라고 권하는 사찰에서 벌이는 다양한 할인행사다.
기와불사, 연등불사는 기본이다. 각종 절기에 맞춰 제사를 지낸다는 현수막이 걸려있고 불탑을 1만개나 세운다며 돈내고 복받으라고 권한다. 아예 대놓고 돈내면 자손대대로, 거기다 다음 생에서도 복받는다고 써놨다. 보문사 뒷편으로 마애석불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초입부터 빽빽하게 걸린 연등이 계단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마애석불 앞에는 금빛 찬란한, 십중팔구 훨씬 더 많은 돈을 냈을 황금색 연등이 줄줄이 사탕이다. 연등에는 하나같이 이름과 주소, 그리고 어떤 복을 원하는지 빼곡히 써 있다. 취업기원, 승진기원, 무병장수, 자손번성…
생각해보면 산 속 깊숙이 자리잡은 절, 그리고 머리를 깎고 결혼을 하지 않는 승려란 꽤나 기존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 느낌을 풍기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유럽 중세에서 등장한 수도원 운동도 그렇지만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자녀가 없으니 상속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서유기에도 나오듯이 오공 오정 하는 식으로 돌림자를 쓰는 법명은 강력한 형제애와 소속감을 부여한다. 그 속에서 특정한 신을 섬기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고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 혹은 전문가 집단이 성장했다.
21세기 우리 눈에 비친 사찰은 어떤 모습일까. 내 삐딱한 느낌만 얘기한다면, 교회랑 별반 다르지 않다. 나같은 장삼이사 눈으로는 한국 지식생태계와 괴리된채 무병장수 기도에 열중하고, 각종 재산분쟁과 그들끼리만 치열한 파벌싸움이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딱 개신교가 비판받는 지점과 겹친다. 물론 어떤 분들은 템플스테이를 예로 들며 반론을 제기할 듯 하다. 여러 측면에서 어른 역할을 하는 스님들이 있다는 지적도 나올 것이다.
맞다. 그걸 부정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점 오해 없기 바란다. 하지만 일부 유치원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 유아교육 자체를 욕하는게 아니듯, 불전함으로 도배된 사찰을 비판하는 게 불교 자체를 비판하는 건 아니다. 불교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간절히 바라는건 딱 하나. 한국 불교가 만사형통 사찰쇼핑몰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것 뿐이다. 1000년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국 불교가 뭐가 아쉬워서 만사형통 십자가 쇼핑몰 흉내를 낸단 말인가.
| 2018년 11월에 썼던 <만사형통 사찰쇼핑몰>을 대폭 수정보완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