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누르는 자와 저항하는 자, 검열과 암호편지
광복80주년, 편지에 담긴 좌절과 희망을 다시 읽다
‘청포도’를 쓴 시인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육사는 1932년 4월 대구를 떠나 홀연히 만주국으로 떠났다. 펑톈(현재 선양)에서 의열단 핵심이었던 윤세주를 만났다. 이육사는 그해 6월 경북 영일군(현 포항시)에 살던 8촌 동생 이상흔에게 보낸 엽서에 이렇게 적었다. “뜻한 바를 뜻한 대로 표현치 못하는 나의 고뇌여. 짐작이나 하여 주겠지?”
넉 달 뒤 이육사가 향한 곳은 중국 난징이었다. 의열단이 중국 국민정부 지원을 받아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해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육사로선 뜻한 바를 제대로 밝힐 수가 없는 사정이 있었던 셈이다. 일제 강점기는 곧 검열과 감시의 시대였다.
일제는 편지를 통해 독립운동 정보를 전달하거나 저항의지를 북돋는 편지를 막기 위해 검열하고 또 감시했다. 가령 1929년 ‘교원 공산당 사건’은 일제 경찰이 경성사범학교 학생들의 물건을 검사하다가 발견한 편지에서 경남에서 교사로 일하던 일본인 죠코 요네타로가 자신의 제자였던 조판출에게 민족차별교육을 철폐하고 교직원노동조합을 만들자는 내용을 발견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일본인이면서도 조선총독부를 비판하고 독립운동을 옹호하는 활동을 했던 나카니시 이노스케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일본 노동운동에도 적극 관여했는데, 훗날 그는 자신에게 배달된 편지를 받았던 일을 회고한 적이 있다. 편지봉투에는 ‘통과[閱]’, ‘허가(許可)’ 같은 붉은인이 굵직하게 찍혀 있었다. “그가 (구속되고 나서) 70여일 후 발신 및 접견금지에서 풀려나 그리운 바깥세상을 향한 첫 발신이 나를 향했던 것 같다. 나는 뭔가 수수께끼를 감추고 있는 듯한 그 서신의 봉투를 뜯었다.” 구속되고 예심을 마칠 때까지는 면회는 물론 편지를 주고받는 것까지 모두 금지당했고, 예심 이후 편지왕래는 가능해지더라도 검열을 받아야만 했던 당시 실상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나카니시의 증언처럼 감옥에 수감된 이들이 남긴 편지에는 붉은색 도장이 선명하다. 가령 이중업이 1920년 출옥을 앞두고 아들에게 보낸 편지엔 검열을 통과했다는 붉은색 ‘檢’ 직인 찍힌 게 선명하다. 마찬가지로 광복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총사령을 역임한 박상진이 친일부호 처단사건으로 투옥된 뒤 공주 감옥에서 동생들에게 1918년 보낸 편지 봉투에는 내용을 검열했음을 밝히는 ‘허가’(許可) 직인이 보인다.
감시가 있으면 감시를 피하기 위한 대책도 있기 마련이다. 군자금을 담배로 표현하거나, 상하이를 이모네로 표현. 나비나 꽃 그림을 암호로 쓰는 등 다양한 암호와 은어를 사용한 편지가 등장했다. 이봉창은 일왕 암살을 위해 일본 도쿄에 잠입한 뒤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냈는데, 의거실행을 “물품이 팔린다”라고 표현한 대목이 눈에 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활동했던 한시대가 1944년 ‘중국 충칭 우편사서함 95’로 보낸 편지 첫머리에는 이런 대목도 등장한다. “경애하는 김구 선생님께 검열을 피하고 빠른 전달을 위해 영문으로 보냅니다.”
1920년 부산경찰서장을 사살하라는 지시를 받은 의열단 단원 박재혁은 중국인 고서적상으로 위장한 뒤 중국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했다. 원래 계획은 나가사키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을 타는 것이었지만 나가사키에서 쓰시마섬을 거쳐 부산으로 갈 수 있다는 걸 알고 계획을 변경했다. 그는 상하이로 편지를 보냈다. 한문으로 된 평범한 안부편지였다. 그런데 편지 말미에 이런 글귀가 눈에 띈다.
“熱落仙他地末古 大馬渡徐看多”
이 글귀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죽었다 깨 나도 풀 수가 없다.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으면 “연락선타지말고 대마도서간다”가 된다. 말 그대로 ‘연락선 타지 말고, 대마도(쓰시마섬)로서 간다’는 걸 의열단 동지들에게 알린 셈이다. 21세기 시각으로 보면 ‘이게 무슨 암호편지인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 일본인 경찰들이 대체로 학력수준이 낮았고,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그들로선 운율까지 맞춘 한문 편지를 보고 중국인이 쓴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걸 역이용한 셈이다.
이 편지를 남기고 부산에 도착한 박재혁은 책을 팔러 간 것처럼 꾸며 부산경찰서장을 만난 뒤 폭탄을 터트려 서장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자신도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된 박재혁은 스스로 모든 음식을 거부한 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가사키에서 보낸 편지에 “초가을 서늘한 바람에 몸과 마음이 상쾌하니 아마도 많은 수익이 있을 듯 합니다”라며 임무 성공을 암시하면서 “그대 얼굴을 다시 보기를 기약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던 말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선 암호를 사용해 편지를 주고받곤 했는데, 자음과 모음의 표시를 바꾸는 게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가령, ㅍ을 ㅈ으로, ㅗ는 ㅝ로 바꿔버리는 건데, 폭발탄이 편지에선 ‘줩듁쿳’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낱말이 돼 버린다. 암호체계는 시간이 갈수록 체계화됐는데, 가장 완성된 형태는 일본군에 징병됐다 탈영해 한국광복군에 합류한 김우전이 완성한 한글 무전 암호표라고 할 수 있다.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던 광복군이 한미 합동작전을 위해 만든 암호였다.
이 암호는 제작에 도움을 준 미 공군 대위 ‘윔스(Weems)’의 ‘W’와 김우전의 ‘K’를 붙여 ‘W-K 한글 무전 암호표’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이 암호표를 적용하면 ‘가’는 ‘1130’으로, ‘강’은 ‘11300018’이 된다. 암호표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쓰면 ‘134024300012133400111 4390016153000121741’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