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說

500일의 썸머, 5000일의 스타벅스

betulo 2025. 6. 25.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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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벅스에 앉아있다. 두시간쯤 됐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스타벅스에서 노트북을 켜고 두시간쯤 되면 인터넷 연결이 끊어진다. 몇 달 전부터 어김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젠 놀랍지 않다. 다만 짜증이 켜켜이 쌓일 뿐이다. 연인들이 이별할 때가 다가오는 걸 서로 느낌으로 알 듯이. 인터넷을 끊는 건 정을 떼라고 스타벅스가 배려해 주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 본다.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조금은 덜 짜증스럽다. 하지만 마음이 완전히 평화로워지긴 쉽지 않다. 하필 뒷자리에 모여앉은 손님들 떠드는 웃음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린다. 톰이 500일의 중간쯤 언젠가 그토록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썸머의 특징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듯이.

 스타벅스에 처음 가본 건 2008년 즈음이었다. 스타벅스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H가 커피 한 잔 하자고 해서 따라가보니 스타벅스였다. H는 틈만 나면 스타벅스에 갔다. 커피를 시켜 놓고는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책도 읽고 논문도 쓰고 사람도 만났다. 어찌나 스타벅스를 좋아했는지 안식년을 맞아 교환교수로 간 곳도 스타벅스였다. 덕분에 스타벅스 1호점에서 샀다는 텀블러를 기념품으로 얻었다.

 당시엔 H가 스타벅스를 좋아하는 게 꽤 낯설었다. 무엇보다도 스타벅스는 다른 곳보다 비쌌다. 그곳 커피가 다른 곳보다 특별히 더 좋은지도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생각이었다. 그러다 스타벅스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다. 계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역시나 와이파이였다. 2010년 즈음만 해도 와이파이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카페가 흔치 않았다. 스타벅스를 비롯한 프랜차이즈 카페 정도였는데 경험상 스타벅스 와이파이가 가장 안전했다. 그 말인즉슨, 다른 카페에선 와이파이가 갑자기 끊기거나, 아예 접속이 안되거나 하는 일이 많았다. 

 직업 특성상 이건 매우 예민한 문제였다. 사내망에 접속하려면 VPN으로 이중인증을 받아야 하는데, 와이파이가 잠깐 끊기는 건 곧 이중인증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이건 무척이나 짜증나는 사태였다. 자연스럽게 스타벅스를 더 자주 찾게 됐다. 게다가 스타벅스는 자리 깔고 앉아서 몇 시간이고 있어도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커피 한 잔 안 시키고 앉아있는데도 눈치 한 번 주지 않았다. 솔직히 그건 상당한 문화충격이자 신세계였다. 바깥에서 잠깐 스타벅스에 들러 와이파이를 후딱 연결해서 기사를 보내거나 이메일을 보내거나 하는 일이 늘어났다. 

 그렇게 조금씩 스타벅스에 더 자주 가고 더 오래 있게 됐다. 특히나 당시 그 어떤 곳보다도 노트북을 켜놓고 일하기에 좋은 실내 환경은 말 그대로 결정타였다. 주말이나 저녁에 스타벅스에 앉아서 글을 쓰는 날이 많아졌다. 확실하진 않지만 여섯 시간 동안 일어나지도 않고 논문을 쓴 게 최고기록이었다. 결국 박사논문을 쓰는 데 스타벅스는 다섯번째 손가락 안에 드는 공로자라고 할 수 있겠다. 습관이란 게 무섭다. 처음엔 커피 한 잔도 아깝다 싶었는데 자몽허니블랙티도 시키게 되고 바나나도 시키게 되고 샌드위치로 아침을 대신하기도 했다. 어차피 딴 데 가서 먹느니 그냥 여기서 먹지 뭐. 조각케익도 사먹는다. 어플리케이션에 돈을 충전하는 것도 평범한 일상이 됐다. 

 뭔가 위화감이 들기 시작한 게 언제였을까. 어쨌든 시작은 의자였다. 특별히 좋아하는 스타벅스 한가운데 넓은 원목책상이 어느 순간 다리가 길어졌다. 의자도 길어졌다. 그 의자에 앉으면 다리가 바닥에 닿질 않는다. 오래 앉아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허리가 굽는 느낌이 들었다. 스타벅스의 놀라운 성공에 자극을 받은 덕분인지, 어지간한 카페는 모두 와이파이가 빵빵 터지고 도서관 뺨칠 수 있을 정도로 쾌적하게 일할 수 있게 실내공간을 바꿔나갔다. 스타벅스만이 제공하던 안락함 혹은 편안함이 시나브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습관이었다. 가던 발걸음이 스타벅스로 이끌었다. 익숙하니까 스타벅스에 갔다. 

타이베이에서 가 봤던 스타벅스. 오래된 건물을 개조해서 독특한 멋이 있었다.

 이제 스타벅스는 와이파이가 불편한 곳이 됐다. 와이파이가 정을 떼는 역할을 하게 됐다. 일하기에 확연히 좋은 곳도 아니었다. 그냥 ‘오늘의 커피 숏사이즈’를 시켜서 싼 커피를 마시며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됐다. 그런 와중에 와이파이가 끊기는 두 시간은 분노 바이러스 잠복기가 돼 버렸다. 

 이제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하기 위해 스타벅스에 가는 일은 없다. 스타벅스에 갈 때는 오로지 잠깐씩 노트북을 켜고 일을 처리해야 할 때다. 그리고 스타벅스에 정을 떼기 시작하고 나서야 눈에는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엔 스타벅스보다 더 멋지고 쾌적하고, 심지어 커피도 맛있는 카페가 참 많다.

무교동 식당가에 있는 다동커피는 수제커피 향이 은은하게 코를 자극한다. 경희궁의 아침 근처에 있는 팀트라는 카페는 따뜻할 때 바깥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 시켜놓고 있으면 몸과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서울도서관 5층 하늘뜰은 햇빛을 보며 커피를 마시기에 참 좋다. 성공회대성당 앞에 있는 카페 그레이스는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나다. 그밖에 오래두고 가까이 하기 좋은 카페가 참 많다. 그리고 그 모든 곳들이 스타벅스보다 인터넷 환경도 좋다. 이제 정말로 스타벅스와 갈라설 때가 됐다. 썸머와 헤어진 톰이 새로운 운명을 찾아가듯이. 

[사족]
2025년 6월 어느 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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