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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사해/순회특파원(2011)

[중동취재기] 타흐리르 광장은 여전히 중동의 해방구

by betulo 2011.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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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민주화 혁명의 성지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이곳은 지금 두 얼굴이 공존한다.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철권독재는 사라졌지만, 민주화는 아직도 오고 있는 중이고, 그 자리를 혼돈이 눙치고 앉아 있었다.

계속되는 혼란


지난
526일 목요일. 타흐리르 광장은 불법주차 차량들로 넘쳐났다. 혁명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풍경이다. 경찰 한 명이 차를 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곧바로 그 경찰은 수십명의 군중에 둘러싸여 버렸다. 경찰이 노점상과 불법주차 차량을 단속하려 하자 군중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모습이었다.


 
한참을 떠들어도 도저히 안 먹히자 경찰은 결국 지원을 요청했고 곧이어 경찰 서너명이 더 나타났다. 그러나 경찰과 군중들의 실랑이는 그로부터 한참을 더 이어졌다. 옥신각신 끝에 결국 불법주차했던 차 주인이 차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노점상이 물건들을 주섬주섬 거둬들이는 것으로 실랑이는 끝이 났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바로 옆에 불법주차돼 있는 수십대의 차량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던 듯 경찰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석달 전 타흐리르 광장을 뜨겁게 달궜던 민주화의 열기는 이렇게 표정을 바꿔가고 있었다. 독재자를 몰아낸 이 시민의 힘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타흐리르 광장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독재는 몰아냈지만 그 자리를 메울 민주적 질서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혁명의 발단이 됐던 식품가격 상승도 여전히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관광객이 줄면서 최대 수입원인 관광산업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정권퇴진 운동이 정점으로 치닫던 1월 말보다는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치안 역시 불안하다. 관광객들을 다시 불러 모으려면 치안을 안정시켜야 하는데 정작 시민들은 불법주차 단속 같은 정당한 공무집행 조차도 경찰 말이라면 일단 반발부터 한다. 무바라크 퇴진과 함께 추락한 공권력의 권위는 이처럼 아직도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날 눈에 비친 타흐리르 광장은 이집트의 무질서를 상징한다. 사람들은 뭔가 조급해 한다. 차선과 신호등도 없는 곳이 태반인 카이로 시내 도로에선 과속과 난폭운전이 부쩍 늘었다. 다음날 열릴 예정인 대규모 집회도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한 자들과 부패정치인들에 대한 심판이 기대보다 훨씬 늦어지고 있다는 불만을 표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일부에선 젊은이들이 너무 서두른다고 불만스러워한다
. 임시정부를 이끄는 군부 퇴진 요구도 포함돼 있어서 자칫 군부와 충돌이 발생할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다행히 군부가 이날 저녁 광장 주변에서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덕분에 27일 집회는 충돌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됐다. 한 시민은 이에 대해 군부의 현명한 판단에 경의를 표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나는 군부를 신뢰한다.”면서 오늘 집회를 주도한 젊은이들이 너무 서두른다.”고 말했다.

혁명은 계속된다


 
그러나 이것이 타흐리르 광장의 모든 것은 아니다. 지난 527, 즉 금요기도회가 열린 광장은 전혀 딴판이었다. 평소엔 귀청을 울리는 경적소리와 난폭운전으로 난리법석이지만 금요일만은 해방구로 변신했다. 무바라크 퇴진 운동과 함께 시작된 수십만명의 집회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타흐리르는 아랍어로 해방이란 뜻이다. 금요일만은 이름값 제대로 하는 광장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쿠란은 금요일 다같이 모여 기도를 하라고 규정했다. 이슬람 사회에선 그 어떤 집회시위도 원천봉쇄하는 독재자라 할지라도 어쩌지 못하는 게 금요일 기도회다. 이집트 혁명 과정에서도 금요일은 자연스럽게 혁명 열기가 폭발하는 날이었다. 첫 집회가 열렸던 125일이 그랬고 무바라크가 물러났던 211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카이로 시내에서 가장 너른 장소인 타흐리르 광장은 수백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혁명을 성공시켰던 바로 그 장소였다.


광장에 진입하려면 시민들이 곳곳에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검문을 통과해야 한다
. 검문하는 이들은 강압적이지 않고 시민들은 적극 협조해준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한다. 여권을 보여주며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하자 환영한다며 길을 내준다. 10m 쯤 더 가자 이번에는 소지품 검사와 몸수색을 한다. 검색이라고 해봐야 1~2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이를 통해 위험한 물건이나 수상한 사람들이 광장에 섞여드는 걸 막고 있다.


검색을 통과하려는데 한켠이 소란스러워진다
. 가방에 칼을 넣어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칼을 빼앗긴 뒤 광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광장 한켠에 젊은이들이 플래카드를 걸고 있는데 어떤 여성이 다가가서 플래카드를 매다는 줄 끝에 달린 PET병 뚜껑을 열어서 속을 살핀다. 혹시 화염병은 아닌지 검사하려는 것이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집회 참가자들은 너나없이 조심스러워했다.


 
타흐리르 광장 주변에 모여 있는 대학생들에게 오늘 집회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 물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오늘 함께 만나서 집회 참가하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혁명 당시 광장에서 노숙하며 농성을 했다. 한 학생은 당시 친정부 시위대 공격을 받아 각목에 다리를 다치기도 했다. 이들에게 오늘 집회에 왜 나왔느냐고 물었다. “이집트의 미래를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한 마디로 이렇다. “무바라크를 감옥에 보내야 한다.”
 



 짧은 검문을 마치자 붓을 든 한 사람이 다가와 왼쪽 팔에 이집트 국기와 숫자 ‘25’를 그려준다. 검문을 통과했다는 인증인 줄 알고 팔을 내맡겼다가 그림을 다 그리자 고맙다고 했더니 “20 파운드라고 한다. 알고 보니 시위대와는 무관한 장사꾼이다. 혁명을 상징하는 티셔츠, 국기, 그리고 국기를 팔에 그려주는 노점상은 타흐리르 광장을 누비며 대목을 한껏 누리고 있었다.


 
타흐리르 광장 중심부에 들어섰다. 플래카드가 여럿 걸려 있었다. “국민들은 무바라크와 부패 정치인을 재판하길 원한다.” “국민들은 혁명과 언론자유를 원한다.” “국민들은 군사재판을 원하지 않는다.” 광장 곳곳에 무대를 설치하고 있었다. 이날 집회는 주최 단체 자체가 없다. 기도를 위해 그리고 이런저런 집회를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로 타흐리르 광장은 금요일엔 언제나 붐빈다. 혁명이 낳은 새로운 풍속도다.


정당이나 단체들은 각자 알아서 무대를 설치하고 연설을 하며 청중들에게 호소한다
. 그런 연단이 광장 주변에 다섯곳이 넘는다. 사람들은 각자 광장 주변을 돌아보며 연설도 듣고 이런저런 피켓과 플래카드도 살펴본다. 그러다 정오가 되면 다같이 기도를 한다. 기도가 끝나고 나면 다시 오전과 똑같은 모습이 저녁까지 이어진다.





 연단에서 한 연사가 아직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혁명은 여전히 원하는 게 많다.”며 열변을 토한다. 연설 뒤에는 구호와 노래가 뒤를 잇는다. 2/2/3으로 박자를 맞추는 구호 역시 혁명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무대에서 울려퍼지는 현대적이고 경쾌한 노래 역시 혁명 와중에 나온 민중가요. “이집트 사람이라면 손을 머리 위로 올려라라는 노래가사에 맞춰 연단 주변에 있던 시민들은 국기를 흔들며 호응한다.


 
광장엔 온갖 사람들로 넘쳐난다. 다섯살도 안된 어린이부터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들까지 각양 각색이다. 가족단위 참가자도 흔히 볼 수 있다. 한 가족 참가자들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히잡을 멋스럽게 머리에 두른 젊은 여성은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사진 찍는걸 거부했다. 화장도 안했는데 사진이 예쁘게 안 나올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아닌게 아니라 광장 곳곳엔 다양한 색깔을 한 히잡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멋을 낸 젊은 여성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물론 부르카를 입은 여성, 맨머리를 드러낸 여성도 있다. 중동에서 가장 개방적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사실 이집트는 1960년대 이전까지 카이로 시내에선 히잡 자체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이 넘쳐났던 카이로가 50년 가까운 보수화 뒤에 다시 기지개를 펴는 셈이다.



  이집트를 재발견하다


 
30년 독재를 이겨낸 혁명은 이집트를 호출하고 있다. 모두가 이집트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집트 국민이라는 의식이 만개한다. 자신들의 손으로 독재자를 몰아냈다는 자부심과 결합하면서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월드컵 거리응원과 촛불집회가 전국을 메아리쳤던 2002년 한국이 겹쳐보인다.


나는 이집트를 사랑한다거나 ‘125이라고 쓴 티셔츠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이집트 국기를 흔들고 국기 모양을 본딴 각종 표현물이 광장에 넘쳐난다. 몇 달 전만 해도 국기는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 응원물품에 불과했다. 광장 주변에서 이집트 국기를 파는 한 노점상은 20 이집트파운드에 판매하는 국기가 잘 팔린다며 흡족한 표정이다. 오늘 얼마나 팔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더니 70개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단다.


 
콧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한 중년 남성이 한 손엔 이집트 국기를 들고 젊은 여성과 어린이와 함께 광장으로 향하고 있는게 보였다. 정부에서 일한다는 것 말고는 자세한 자기소개를 거부한 이 공무원은 시골에 사느라 그동안 집회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딸과 외손자에게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기 위해 이날 광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금요일마다 광장을 찾는 열성적인 혁명 지지자이다.

 
외손자를 목마 태운 그의 표정엔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가득했다. “이집트는 미래가 밝습니다. 우리에겐 우수한 인재도 많고 자원도 많습니다. 잘 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광장에서 만난 한 시민은 마흔살이 넘도록 지금까지 선거에 참여해 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했다. “독재정권을 지지할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지만 투표를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그랬던 그가 오는 9월 총선과 11월 대선을 손꼽아 기다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선거인데 무척 설렙니다. 이집트를 이끌 지도자를 우리 손으로 뽑는 것이잖아요.”


혁명의 발단이 됐던 식품가격은 여전히 내릴 줄 모른다. 정치 격변 한 켠에선 극단주의 정당이 활동을 시작했다. 공권력은 무너졌지만 새로운 질서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런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기자 앞을 스쳐가는 한 승용차의 뒷유리창에 큼지막하게 써붙여진 문구는 이집트인들이 지금 중동의 새 역사를 직접 써가고 있음을 웅변했다. 뒷유리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난 이집트가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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