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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4

메멘토 모리, 원폭2세 환우 김형율 혹은 김형률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라고 한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외치며 짧은 생을 치열하게 살았던 김형율 혹은 김형률. 그가 죽은지 5월 29일로 9주기가 된다. 기자 초년 시절 기자회견장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인터뷰 기사를 쓰라는 선배 지시에 따라 나는 그와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약속은 몇차례 연기됐다. 그가 과로로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왕복하는 것조차 그에게는 병원신세를 져야 할만한 '과로'였다. 깡마른 체구와 삶을 향한 열정. 형형한 눈빛으로 그는 내 기억에 남았다. 2년 후 그의 사망 소식을 대구 지역단체 분한테 들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3년이 흘렀다. 원폭피해자 진상규명에 관한 법은 국회에서 먼지만 뒤집어쓰다가 자동폐기되는 와중에 올해도 어김없이.. 2014. 5. 26.
히로시마 원폭피해 조선인 할머니 증언, “갈기갈기 찢어졌다” “사람들이 이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걸 그때 처음 알았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졌을 때 곽복순 할머니(오른쪽 아래 사진)는 17살이었다.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곽 할머니는 “내가 겉보기엔 건강해 보이지만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어”라는 말로 평화기행 참가자들에게 악몽같았던 그날의 기억을 들려줬다. 히로시마 원폭피해자복지관에서 생활하는 곽 할머니는 후세에게 그날의 경험을 들려주기 위해 강연에 나선다. 처음 강연을 할 때는 그날 죽어간 사람들 생각이 나서 아무말도 떠오르질 않아 학생들을 앞에 두고 그냥 울기만 했다고 한다. 다음은 곽 할머니가 증언한 내용이다. /편집자주 1945년 8월 5일에 거리에 나가 집주위 정돈도 하고 쓰레기.. 2011. 9. 14.
히로시마 평화공원 한켠 얻는데 30년 걸린 한국인희생자위령비 히로시마 평화공원 한켠에는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오른쪽 아래 사진)가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1970년 4월 10일 히로시마시 평화공원 밖에 건립된 한국인위령비가 평화공원 안으로 들어오는데만 3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니시모토 마사미 일본 츠고쿠신문사 편집위원은 “한국인위령비가 평화공원 밖에 있던 것을 민족차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이는 오해”라고 말한다. 니시모토 편집위원은 “애초 한국인위령비가 있던 곳은 조선 왕손이었던 이우를 구조했던 곳에 세운 것이며 민족차별과는 상관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원폭 당시 조선인 피폭자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도움을 제대로 못받았다고 하지만 그건 오해”라며 “당시에는 누구나 치료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니시모토 편집위원의 설명에 대해 김동렬 대구KY.. 2007. 3. 20.
[르포] 전시장에 갇힌 '반핵' 히로시마를 가다 (2005.2.4) 히로시마 시내를 둘러보면 이 도시가 과연 60년전 지옥같은 피폭 경험을 한 도시라는게 믿어지지 않는다. 히로시마는 어디를 둘러보나 잘 정돈되고 청결한 느낌을 준다. 양갓집 규수처럼 조용조용 소곤거리며 친철하게 대하는 시민들도 어두운 느낌은 전혀 없다. 평화기념자료관과 원폭돔, 평화공원 곳곳에 자리잡은 위령비를 접하고서야 비로소 이 도시가 평생토록 잊지 못할 상처를 안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평화자료관에서 히로시마가 지난 세기 일본에서 가장 번성한 군사도시였다는 걸 느끼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공원 한켠에 조용하게 자리잡고 있는 한국인위령비를 찾기 전까진 피폭 사망자 가운데 10% 가량이 조선인이었다는 것을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홀로코스트산업과 피폭자마케팅 히로시마는 과연 평화도시인가? 대.. 2007. 3.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