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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7

메멘토 모리, 원폭2세 환우 김형율 혹은 김형률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라고 한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외치며 짧은 생을 치열하게 살았던 김형율 혹은 김형률. 그가 죽은지 5월 29일로 9주기가 된다. 기자 초년 시절 기자회견장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인터뷰 기사를 쓰라는 선배 지시에 따라 나는 그와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약속은 몇차례 연기됐다. 그가 과로로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왕복하는 것조차 그에게는 병원신세를 져야 할만한 '과로'였다. 깡마른 체구와 삶을 향한 열정. 형형한 눈빛으로 그는 내 기억에 남았다. 2년 후 그의 사망 소식을 대구 지역단체 분한테 들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3년이 흘렀다. 원폭피해자 진상규명에 관한 법은 국회에서 먼지만 뒤집어쓰다가 자동폐기되는 와중에 올해도 어김없이.. 2014. 5. 26.
히로시마 원폭피해 조선인 할머니 증언, “갈기갈기 찢어졌다” “사람들이 이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걸 그때 처음 알았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졌을 때 곽복순 할머니(오른쪽 아래 사진)는 17살이었다.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곽 할머니는 “내가 겉보기엔 건강해 보이지만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어”라는 말로 평화기행 참가자들에게 악몽같았던 그날의 기억을 들려줬다. 히로시마 원폭피해자복지관에서 생활하는 곽 할머니는 후세에게 그날의 경험을 들려주기 위해 강연에 나선다. 처음 강연을 할 때는 그날 죽어간 사람들 생각이 나서 아무말도 떠오르질 않아 학생들을 앞에 두고 그냥 울기만 했다고 한다. 다음은 곽 할머니가 증언한 내용이다. /편집자주 1945년 8월 5일에 거리에 나가 집주위 정돈도 하고 쓰레기.. 2011. 9. 14.
원폭2세 환우 김형율씨 끝내 숨져 (2005.6.6) 부산대 병원에 안치, 조문객 줄이어 시민의신문 600호(2005년 6월6일자 게재) 원폭2세 환우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는 운동을 펼치던 김형율씨가 지난 5월 29일 오전9시 5분경 부산시 동구 수정4동 자택에서 끝내 숨졌다. 그의 시신은 현재 부산대 병원 영안실에 안치돼 있다. 향년 36세. 김형율씨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과 대구 등지에서 1백명이 넘는 조문객이 부산대 병원을 찾아 김형율씨의 넋을 위로했다. 고 김형율씨 장례위원회는 그와 함께 원폭2세 인권운동을 벌였던 아시아평화와인권연대, 평화박물관, 대구KYC 등이 참여하는 시민사회장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어릴적부터 폐렴을 안고 살아야 했던 고 김형율씨는 자신의 원폭2세임을 알고나서 그 사실을 사회에 알리고 피폭자 환우 2세와 피폭자 문제의 해결을.. 2007. 3. 24.
원폭피해, 남북일 시민사회 나서야 (2005.2.4) 원폭피해, 남북일 시민사회 나서야 북피폭자 일본원호법 지원 못받아, 한국 2002년부터 시민사회 60주년 국제연대로 풀어라 2005/2/4 강국진 globalngo@ngotimes.net 일본에 원폭이 투하된 지 60년이 흘렀다. 하지만 피해는 아물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의 고통 또한 전범국 일본의 편협한 정책으로 배가되어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 피폭자들은 오래전부터 자국 원호법에 따라 치료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한국 피폭자들은 2002년에야 그 혜택을 적용받을 수 있었다. 북측 피해자들은 그나마도 남의 이야기다. 따라서 남북공조를 통해 원폭피해자문제를 해결해보자는 움직임이 시민사회에서 나오고 있다. 또 남북한 뿐 아니라 일본의 시민사회까지 함께하는 국제연대를 통해 올해를 ‘원폭 아픔을 넘어.. 2007. 3. 20.
“북 피폭자 문제 쟁점될 것” (2005.2.4) [인터뷰] 징용근로자 배상판결 이끌어낸 아다치 슈이치 변호사2005/2/4 일본 히로시마 고등법원은 지난달 19일 원폭피해를 입은 한국인 이근목씨 등 징용근로자 40명이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三菱)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대해 “국가는 원고 1인당 120만엔씩 총 4천8백만엔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외국거주 피폭자 대책과 관련한 재판에서 일본 정부에 배상명령을 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원고들은 2차대전 당시 강제로 끌려와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공장에서 일하다 원폭피해를 입었으나 해외거주자라는 이유로 원호혜택을 받지 못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이 판결을 이끌어 내기 위해 변호인으로서 물심양면 노력한 일본 변호인이 있다. 아다치 슈이치(足立修一) 변호사(왼쪽 사진)가 그 주인공이다. 20.. 2007. 3. 20.
[르포] 전시장에 갇힌 '반핵' 히로시마를 가다 (2005.2.4) 히로시마 시내를 둘러보면 이 도시가 과연 60년전 지옥같은 피폭 경험을 한 도시라는게 믿어지지 않는다. 히로시마는 어디를 둘러보나 잘 정돈되고 청결한 느낌을 준다. 양갓집 규수처럼 조용조용 소곤거리며 친철하게 대하는 시민들도 어두운 느낌은 전혀 없다. 평화기념자료관과 원폭돔, 평화공원 곳곳에 자리잡은 위령비를 접하고서야 비로소 이 도시가 평생토록 잊지 못할 상처를 안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평화자료관에서 히로시마가 지난 세기 일본에서 가장 번성한 군사도시였다는 걸 느끼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공원 한켠에 조용하게 자리잡고 있는 한국인위령비를 찾기 전까진 피폭 사망자 가운데 10% 가량이 조선인이었다는 것을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홀로코스트산업과 피폭자마케팅 히로시마는 과연 평화도시인가? 대.. 2007. 3. 20.
원폭희생자 손귀달 할머니의 못다 쓴 비망록 (2004.5.21) 원폭피해자 아픔과 상처 누가 씻어주나2004/5/21북핵을 둘러싼 북미갈등이 지금도 한반도 평화에 먹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만 누구도 한국인 원폭피해자에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내년이면 원폭투하 60주년이 되지만 2천명이 넘는 원폭피해 생존자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다. 모르쇠로 일관하기는 한국정부나 일본정부나 별 차이가 없다. 그나마 지난 96년 건립된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있을 뿐이다.대구KYC 평화통일센터는 ‘피해자 중심으로 반핵평화를 이야기하자’는 취지로 올해부터 원폭피해자 구술증언 사업을 펼치고 있다. 지난 16일 세 번째로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을 찾은 대구KYC회원과 자원봉사자들은 1대1 결연을 통해 맺어진 원폭피해자들의 말벗이 돼주면서 그들의 증언을 기록했다. 대구KYC는 구술증언을.. 2007.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