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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5 14:30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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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년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해로 기억된다. 이 해에 "원·명 교체"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동양사"를 가장한 많은 중국사 개설서는 이 사건을 "명은 원을 멸하고 건국하였다"고 적고 있다.


1368년은 역사 해석 주체의 역사관에 따라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동전의 뒷면처럼 모습을 달리 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누가 무엇을 누구를 위해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하는가에 따라 외양을 달리하는 셈이다. 어떻게 기억하는가,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기억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역사'가 생겨난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1368년, 주원장은 남경(南京)에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는 대명(大明), 연호는 홍무(洪武)였다. 즉위와 함께 '북벌'을 시작했다. 원나라 중앙정부는 이미 싸울 힘이 없었다. 카간의 권위와 위엄은 땅에 떨어진지 오래.


각지의 지방군은 카간을 위해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당시 카간이었던 토곤테무르는 응창(應昌)으로 "작전상 후퇴"했다. 명군은 별 어려움 없이 칸발릭[大都: 지금의 북경에 있던 몽골제국의 서울]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어진 약탈, 방화, 살육...


원나라는 망했나?


토곤테무르 카간은 응창에서 1370년 5월에 죽었다. 명나라에서는 "천명에 따라서(順) 퇴각했다"고 해서 순제(順帝)라고 묘호를 정했다. 몽골존호는 오카가토 카간이다. 토곤테무르 카간의 아들인 아요르시리다라가 새로운 카간이 되었다.(그의 몽골 존호는 빌릭투 카간이다)


아요르시리다라는 토곤테무르 카간과 고려출신의 기황후(寄皇后)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아요르시리다라 카간은 몽골고원의 중심부에 있는 카라코롬으로 서울을 옮겼다. 당시 원나라는 만주·감숙·티베트·운남·중앙아시아의 여러 몽골 세력을 직접·간접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원나라는 아직 망하지 않았다. 원나라는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갖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명나라는 말 그대로 "신흥독립국"이었다. 스기야마 마사아끼가 말했듯이 "일종의 남북조 형태"가 펼쳐졌다.


아요르시리다라 카간은 1378년에 죽었다. 그의 동생인 터구스테무르가 새로운 카간이 되었다. 1387년, 터구스테무르 카간은 나가초와 함께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동지역에서 20만이나 되는 대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나가초는 식량부족 때문에 명군에게 투항해 버렸다. 원나라에겐 치명타였고, 명나라에겐 빛이 되었다.


터구스테무르 카간은 보이르호수 근처에서 명나라 군의 습격을 받아 궤멸되었다. 다음해, 터구스테무르 카간은 톨강 부근에서 아리크버케(코빌라이카간의 막내동생)의 후예인 예수데르에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코빌라이 왕조는 멸망했다. 1388년, 칸발릭을 버리고 몽골고원으로 후퇴한지 20년.


원나라를 사실상 코빌라이 제국으로 단정하고 '왕조사관'을 충실히 따른다면 원나라는 1388년 멸망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진 않다. 예수데르는 1392년 카간이 되었다. 그 후 잦은 내전을 겪으면서도 칭기스칸의 후예를 자처한 여러 명의 '카간'이 등장했다.


그들 모두 "대원 카간"을 칭했다. 몽골어로 "다얀카간"이다. 물론 실상은 코빌라이가 세운 원나라, 즉 대원 올로스와는 차이가 많다. 어쨌든 칭기스칸과 코빌라이카간을 계승한다는 분명한 의식이 드러난다. 학자들은 아요르시리다라 카간 이후 릭단칸(Ligdan Khan, 1604-1634)에 이르는 250여년을 북원(北元)이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한다.


하여간 중요한 건 원나라가 1368년에 망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왜 우리는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는가.


칸발릭을 점령하고 나서 명나라는 바로 원나라의 정식 역사를 편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완성하는데 1년여밖에 안 걸려 완성된 《원사(元史)》는 조잡한 '베끼기'와 부실한 사료조사 등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는다. 편찬자들은 몽골어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명나라로서는 그렇게 라도 급하게 "부실공사"를 해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원나라는 망한 나라가 되어야만 했다. 《원사》편찬은 원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정치작업이었다.


명나라에서는 북쪽에 있던 '몽골'을 '몽골'이라고 부르지 않고 타타르라고 불렀다. 몽골이라고 인정할 경우 정통성 시비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왕조사관'에 따라 명나라는 원나라를 계승한 국가가 되어야만 했다. 북쪽에 있는 '원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는 무리들은 잊어버려야 할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혹은 없애버리거나.


시대를 가로질러 왕조사관이라든가 정통성 시비라든가, 뭐 이런 것들을 다룰 만한 능력은 없다. 단지 여기서는 우리들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 중심의 역사인식'을 문제삼고 싶다. 한국사 속의 사대주의를 그리 비판하는 사람도, 세계사라면 유럽과 미국만, 동양사라면 중국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우리는 분명한 사실조차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화 수준이 높은 중국"을 다스릴 능력이 부족했던 몽골인들은 "명나라에 쫓겨 몽고고원의 사막지대로 후퇴하자," "이전의 부족사회로 퇴보해 버렸다"고, 그냥 단순히, 정확하게는 무책임하게 생각해 버리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 때문에 일본학자가 한 다음의 얘기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왠지 화이사상에 기초한 문명주의나 서구 근대 이후의 민족주의 내지는 '민족국가', '국민국가(이른바 "Nation State")의 개념을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가져, 그 전제 위에 연구가 진행된 상황이었다. … 때로는 '만리장성'(물론 몽골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의 바깥은 '황야'와 '사막' 뿐이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이미지가 아직 어딘가에 떠돌고 있다."


<참고문헌>

르네 그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 1998).

박원길, <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 (국립민속박물관, 1998).

스기야마 마사아키(杉山正明), <몽골세계제국>, (신서원, 1999).

스기야마 마사아키(杉山正明), "몽골시대사연구의 현상과 과제", 《중국사연구》 4, 1998.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1993).

Waldron, Arther N. The Great Wall of China: From History to Myth, (Cambridge Univ. Press, 1990).

2002년 2월4일 세상에 나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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