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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생각한다/판결을 비평한다

저항하지 않은 강간은 무죄인가

by betulo 2007.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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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포럼-법정밖에서 본 판결②
부산고등법원 2004노315에 대한 판결비평 

지난 (2005년) 4월 20일 부산고등법원 제2형사부 지대운, 김동윤, 전상훈 판사는 정신지체2급 여성장애인에 대한 성폭행 사건에서 검사가 기소한 피고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인정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1999년 처음 강간당했을 당시 피해자는 13세였다.

부산고등법원은 피해자가 6-7세 가량의 지적수준을 가진 정신지체2급 장애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도 ‘성교육을 받았고 성 관계 후 생리를 하지 않아 임신한 것 같다 같은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보아 성적 자기방어 능력이 있다’며 항거불능 상황이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성폭력특례법(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6조 ‘항거불능’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바람에 오히려 정신지체 장애인을 ‘보호불능’ 상태로 만든 판결인가. 아니면 죄형법정주의에 충실한 판결인가. ‘항거불능’은 폐지해야 하는 조항인가. 배심제와 참심제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사회적으로 토론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판결을 소재로 참여연대와 <시민의신문>이 공동 주최하는 ‘시민포럼-법정 밖에서 본 판결’의 두번째 주제는 ‘여성장애인과 성폭력’이다. 

■일시: 6월 9일

■장소: 참여연대 2층 강당

■참가자

사회자: 한상희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건국대 법대 교수)

박경순 건국대 법학과 강사, 박세환 한나라당 의원, 방영희 여성장애인쉼터 대표. 


■한상희: 오늘 우리가 비평하고자 하는 부산고등법원 판결은 매우 보수적인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판례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면도 있다. 이 판결에는 억압에 의해 일어난 성범죄, 여성에 대한 범죄, 장애인에 대한 범죄 등 여러 문제가 중첩돼 있다. 여성,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강간사건으로서 이번 판결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보자. 먼저 법원의 편협한 시각에 문제가 있는지 공판과정의 문제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 법원은 항거불능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지, 다른 방법은 없는지 등을 토론해 보자.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소설을 보면 한 선배가 후배에게 이런 말을 하는 구절이 있다. “여성을 강간할 때는 바닥에 돌을 깔아놓고 그 위에 여성을 눕혀라, 그러면 여성은 등이 너무 아프니까 ‘이 돌 좀 빼고 하자’고 말할 것이다. 그럼 강간이 아니라 화간이 되는 것이다.” 먼저 여성계에서는 강간을 판단하는 요소에서 항거불능이 들어가야 한다고 보는지 아니면 의사에 반하는 모든 강제된 성을 강간으로 규정하는지, 강간의 범위를 묻고 싶다.

■방영희: 이번 판결을 접하고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대법원에 상고하고 전국적인 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지금은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성폭력특별법(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처음 제정할 당시 ‘항거불능이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는 말을 들었다. 항거불능은 늘 논란의 중심이었다. 장애인 쪽에서는 항거불능이라는 조항 자체를 삭제해야 한다고 본다.

■박경순: 성범죄는 여성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모독하는 범죄행위다. 강간죄를 여성의 입장에서 재구성해야 한다. 법원의 판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장애인에게만 적용되도록 한 것이다. 법을 개정해서 여성장애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본다.

■박세환: 전통적인 강간죄 이론은 합의에 따른 정상적인 성행위와 강간을 구분하기 위해 여성이 저항해야 한다고 본다. 즉 폭행과 협박이 저항을 강제로 억누를 정도가 되야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남성은 공격적인 본성을 갖고 있고 여성은 수동적이기 때문에 성관계에서 약간의 저항은 항상 수반된다’는 시각이 남성들 사이에서 존재한다. 그런 시각이 시대정신을 담는 판결을 방해한다. 강간죄를 넓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 방향으로 성폭력특별법을 개정해야 한다.

정신지체2급 자체가 ‘항거불능’

■한상희: 성폭력특례법 제6조는 ‘신체장애나 정신상의 장애로 항거불능인 상태에 있음을 이용하여 여자를 간음하거나 사람에 대하여 추행한 자는 형법 제297조(강간) 또는 제298조(강제추행)에 정한 형으로 처벌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오늘 다루는 사건 피해자는 정신지체2급 장애인으로 지적수준이 6-7세에 불과했다. 이런 경우 위해와 위협을 어느 정도로 규정해야 할까.

■방영희: 정신지체2급은 지능지수가 35-49인 사람이 해당된다. 이들에게는 그림을 보여주며 가장 이해하기 쉬운 용어를 써서 성교육을 한다. 여러 번 설명을 해주면 대답도 잘 한다. 그럼 제대로 이해했구나 생각한다. 그러나 심리상담사가 다른 자료로 성교육을 하면 처음 보는 내용이라며 신기해 한다. 게다가 배운 내용을 어떻게 현실에 적용해야 하는가도 제대로 모른다. 그게 정신지체 2급이다. 배추를 그림으로 설명해주고 마당에서 배추를 가져오라고 하면 엉뚱한 것을 가져온다. 부산고등법원은 판결문에서 학습능력등을 고려할 때 항거불능이 아니었다고 판결했다. 판사가 정신지체2급이 무얼 뜻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검찰측 잘못은 없었을까?

■한상희: 한국은 세계적으로 무죄율이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하는데 이 사건은 유독 검찰에서 유죄라고 한 것을 무죄판결했다는 점에서 드문 경우다. 이 사건은 ‘법리가 전통적인 개념으로 항거불능을 해석한다 하더라도 강간의 요건에 해당한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검사가 제대로 못했을 수도 있고 판사가 오해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관계 입증과정에서 검찰이 뭔가 잘못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방영희: 검사나 판사들을 만나보면 정신지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 중에는 정신지체에 대해 많이 물어보고 직접 만나보려고 노력하는 법조인들도 있다. 그런 법조인이 관련 사건을 맡으면 진일보한 판결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부산지방법원 판결문은 ‘항거불능’이라는 도그마와 장애인에 대한 오해로 똘똘 뭉쳐 있다. 그 판사가 정신지체2급 장애인을 실제로 만나본다면 그런 판결은 결코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경순(왼쪽 사진): 판사도 문제지만 검찰도 문제가 있다. 검찰은 피해자가 성교육을 받은 사실이 있고 생리를 안해서 임신한 걸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자기 몸에 이상이 있으면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느낀다. 검찰은 장애 자체가 항거불능이라는 걸 입증하는 노력이 부족했다. 형법 제302조는 ‘미성년자나 심신미약자를 간음 또는 추행하는 행위는 5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도 피고인을 성폭력특별법 제8조로 기소하지 않고 형법 302조로 기소했더라면 법원이 달리 판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박세환: 항거불능이란 말 자체가 강간죄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본다. 항거불능의 바탕에는 여성이 저항하면 강간은 없고 강간을 당한 여성은 ‘실패한 여성’이라는 관념이 들어있다. 이는 여성은 당연히 필사적으로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미국에서도 1970년대 이후로는 항거불능 개념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때리고 겁을 줘 강간하는 건 내 생각엔 10년 이상은 선고해야 한다. 그 외에 여성의 명확한 거절을 무시하면서 강제로 성행위한 것도 처벌해야 한다.

■한상희: 강간죄의 본질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고 할 수 있다. 비장애인과 다르게 장애인은 다른 환경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비장애인에게 항거불능에 해당하는 효과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어떤 경우가 있을까.

■방영희: 휠체어가 있어야 이동을 할 수 있는 장애인 여성은 휠체에서 분리돼 있다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위협을 느낀다. 정신지체장애인들에게는 ‘죽여버린다, 때리겠다, 엄마에게 이르겠다, 아빠를 혼내주겠다’ 같은 말만 들어도 엄청난 위협이 된다. 뇌성마비장애인들은 몸을 움직이기 힘들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옮겨줄 때 추행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도움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시각장애인의 경우 종이를 말아서 칼이라고 거짓말해도 꼼짝 못하고 당하는 경우가 있다. 아무곳이나 끌고 가면 산 속인지 주택가인지 알 수가 없다. 시각장애인은 가해자의 인상착의도 설명할 수 없다.

■한상희: 본인 의사에 반하는 간음을 강간으로 규정한다면 장애인관련 성범죄는 상당부분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정신지체 장애인의 경우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하기가 곤란하다. 또 명시적인 의사에 반해 간음하는 것을 강간으로 규정하면 남성에게 지나치게 불리하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는게 사실이다.

■방영희(오른쪽 사진): 그런 사건을 접할 때 우리도 미심쩍을 때가 있다. 정신지체 유형이 너무나 다양하다. 우리가 중점을 두는 것은 정신지체장애인들의 인권이다. ‘명시적인 의사에 반한 간음’이라는 표현조차 항거불능처럼 피해자를 ‘보호불능’ 상태로 만드는 판결에 이용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아예 항거불능 조항을 삭제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박세환: 나는 항거불능을 ‘합리적이고 진지한 저항’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상적인 성관계와 범죄행위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그 정도 규정조차 없으면 장애인들이 성적배우자를 찾는게 더 어려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장애인들도 성적으로 즐길 권리가 있다.

■박경순: 항거불능 조항을 빼면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데 동의한다. 형법 302조에서 말하는 심신미약과 미성년자를 같이 포함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반인 법감정이 판결 영향 미치는 시스템 절실

■한상희: 참배심제가 보완책으로서 가능하지 않을까.

■박세환: 일반인의 법감정이 기준이 되야 한다고 본다. 참심제나 배심제를 채택하면 이번 사건의 경우 당연히 유죄판결이 나왔을 것이다. 참배심제 도입을 통해 일반인들의 법감정이 법원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박경순: 장점도 있겠지만 단점도 있을 것 같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 보는 앞에서 자신의 치부를 되풀이해서 드러내야 하는 문제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박세환: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자이면서도 죄인인게 현실이다. 조금 불편한 게 있더라도 처벌할 사람은 처벌해야 한다. 여성들이 부끄러워하지 말고 계속 얘기해야 한다.

■한상희: 강간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감정을 하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제도를 바꾸면서 그 비용을 줄여준다거나 전문가들이 법정에서 증언하는 기회가 많아야 한다고 본다.

■방영희: 경찰서에 녹화실이 있다. 문제는 녹화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경찰, 검찰, 법원에서 두 번 세 번 한다는 데 있다. 녹화한 내용을 전폭적으로 재판부에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2차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녹화 한 번 하고 돌아온 성폭력 피해 아이들이 토하는 경우도 봤다. 아이들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박경순: 항거불능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바람에 처벌해야 할 가해자를 풀어준 것이 오늘 다루는 판결이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항거불능 기준을 완화하는 판례도 있다. 정확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지 잘 모르면서 기준도 없이 판결하는 경우는 없었으면 한다. 비용문제에 대해 말한다면 상담소, 특히 지방 소도시 상담소에 대해 정부지원과 제도적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지방은 그런 사건의 경우 입증하기 힘들어서 무죄판결 나오는 경우 많다는 말을 들었다.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한상희: 강간은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정체성을 침해하는 범죄라고 생각한다. 위력·협박· 강제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은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런 사건에 대해 무죄가 나온 것은 정의롭지 못한 판결이라고 본다. 처벌할 사람은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 더 많은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긴 시간 얘기해준 여러분께 감사한다.

정리=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2005년 6월 16일 오전 10시 51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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