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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

서봉수 명인 "내 기력은 지금도 늘고 있다"

by betulo 2016.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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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살 나이에 당대 바둑 최고수를 이기며 ‘명인’이 됐다. 한국 바둑 최초로 통산 1000승 기록을 세웠다. 특히 1997년 진로배 국가 대항전에서 중국과 일본 기사 9명을 연달아 꺾었던 전무후무한 9연승 기록은 그의 바둑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바둑인 서봉수 9단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그가 60대가 된 지금도 바둑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있게 말한다. “내 바둑 실력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바둑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국으로 그는 명인전 우승, 응씨배 우승, 진로배 9연승 세가지를 꼽았다. ‘실전바둑’으로 유명한 그답게 그는 “바둑이란 바둑판 위에서 벌어지는 전쟁”라고 규정했다.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서봉수 명인이 자기 목소리로 삶을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썼다.

 

 -“바둑은 아버지 어깨너머로 처음 배웠다.”

 내가 1953년 충남 대덕군(지금은 대전시 대덕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충남대 교직원이셨다. 축구선수로도 활동했는데 헤딩을 참 잘했다.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으면 차범근처럼 축구선수로 성공할 수도 있었을 거란 얘길 들을 정도였다. 중학교 1학년이었나, 2학년이었나 아버지가 바둑을 참 좋아하셔서 기원에서 바둑을 자주 두곤 했다. 어머니가 밥을 챙겨 나를 기원에 심부름보내곤 했는데 아버지가 저녁도 안드시고 바둑을 두면 나도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자연스럽게 아버지 어깨 너머로 바둑을 배우게 됐다. 처음엔 오목부터 배우다 바둑을 시작했다.


 집안이 아주 가난하진 않았지만 다들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바둑은 그만두고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내가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했다. 나중에 뭐먹고 살지 걱정도 됐다. 바둑을 하지 않았으면 무얼 했을까. 돌아가신 형님이 대전에 살았는데 아마도 형님한테 의지해서 살지 않았을까 싶다. 고등학생 때 바둑 국가대표로 뽑혀 타이완에 가게 됐다. 자동차도 타기 어려운 시대에 비행기를 타고, 거기다 고교생 바둑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그때부터는 어머니도 인정을 해줬다. 


 정식으로 선생한테 배운것도 아니고 유명하다는 책 몇 권 본 게 전부였다. 내 바둑은 거의 독학으로, 실전을 통해 익혔다. 그러다 보니 어떤 분들은 ‘된장 바둑’이라고 부른다. 나 자신은 ‘된장 바둑’보다는 ‘고추장 바둑’이란 말이 맘에 든다. 당시엔 우승 타이틀 차지하는 건 다 일본 유학파였다. 당시 일본은 세계 바둑 최강이었으니까. 나라고 일본 유학을 가고 싶지 않았겠나. 가려고 하다가 잘 안됐다. 


 -바둑 입단을 한게 1970년이었는데 1년 8개월만에 조남철 9단을 이기고 명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하늘같은 선배들을 이긴다는건 나조차도 상상도 못했다. 배운다는 생각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그래도 젊다보니 겁없던 시절이었고 패기가 넘쳤다. 덜컥 우승까지 하고 보니 지금도 내 별칭이 ‘서 명인’이다. 입단에서 첫 우승까지 1년 8개월 걸렸다는데 지금도 그 기록을 깬 후배가 없다. 


 당시로선 새파란 2단짜리가 당대 최고수를 이겼으니 바둑계에선 난리가 났다. 우승 소식이 신문 1면에 날 정도였다. 더구나 내가 순수 국내파라고 하니 주변에서 더 응원을 해줬다. 그 때는 반일감정이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하던 시절이었다. 하여간 명인전 우승하고 나서 얼마 있다가 조훈현 9단이 유학 마치고 귀국해서 국수전에서 우승했다. 그때부터 15년 가량은 ‘조 국수와 서 명인 시대’라고 표현하곤 했다. 


 바둑계에선 조·서 시대라곤 하지만 사실 조 9단 독주시대였다. 1970년대부터 20여년간 조 국수와 결승전만 150번도 넘게 한 것 같다. 초창기엔 서로 이겼다 졌다 했는데 나중에는 많이 졌다. 조 국수 시대 조연 구실을 했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고비마다 독주를 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니까 사람들 보기에 강한 인상을 준 것 같다. 


한국 바둑계의 영원한 맞수 조훈현과 서봉수 9단.70`80년대 15년간이나 계속됐던 두사람의 명승부가 오는 10월 삼성화재배에서 재현된다.사진은 80년대 후반 거의 매번 모든 기전의 결승에서 만나 대국을 벌이던 모습이다.


 -1988년 첫 응씨배 우승을 조 국수가 했다. 바둑 우승했다고 카퍼레이드까지 해본 건 조 국수밖에 없었다. 1992년 제2회 대회에선 내가 결승에 진출했는데 상대가 ‘일본의 미학’이라는 오다케 히데오였다. 당시엔 ‘미학’ 하면 화초 바둑을 생각하는데, 뭔가 좀 얕잡아보지 않았나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 그랬던 것 같다. 


 오다케가 보기에 내 바둑은 기본기도 안된 무식한 바둑이니 경시했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괜히 모양이나 따지고 난전에는 약하지 않을까 싶어 경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사실 미학이라는게 바둑의 아름다운 행마와 멋을 추구하는 것이고, 나쁜게 아닌데 젊어서는 그렇게 생각하질 못했다. 당시 대결은 실전 바둑과 미학 바둑의 대결이었다. 오다케 역시 모양이 나쁜 수는 아예 두질 않았다. 


 당시 결승전에서 마지막 5번기를 두는데 초반에 오다케가 완착으로 굉장히 유리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초강수를 연거푸 이어가며 혼전을 유도했다. 결국 실수를 놓치지 않고 대마를 역으로 잡아냈다. 역전승이었다. 당시 한중일 세 나라 바둑을 비교해보면 일본은 예술바둑, 중국은 대륙바둑이라면 한국은 실전바둑이었다. 지금 세계 바둑계는 한국바둑이 대세다. 일본과 중국도 실전바둑으로 바뀌었다. 


 바둑을 두다 보면 불리한 건 역전시키고, 유리한건 지켜야 한다. 그런데 그게 자력으로 잘 안된다. 9번을 두면서 자력으로 모두 이기는건 힘들다. 상대가 자멸하고 해서 운이 따라 줘야 한다. 내게 운이 따라줘서 9연승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응씨배 우승했을 때도 ‘천운이 따른 기적같은 역전승’이라고들 했다. 운이 따라줬다. 당시 보도를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는 이번 진로배에서 실성한 사람처럼 앞뒤 안가리고 전가의 보도를 휘둘러대 바둑계를 경악케 했다. 그 앞에 섰다가 무사한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1997년에 진로배에서 9연승을 거둔 건 아마 바둑 역사에서 깨지지 않을 것 같다. 실력이 다들 상향평준화가 됐기 때문에 웬만한 운이 없으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뭐랄까 99.9% 정도 졌다 싶었는데 상대가 1+1을 3이라고 쓰는 정도 실수를 해줬다. 끝내기 세군데 남았는데, 선수를 한 집하고 두 군데 차지하고 나는 한집 차지하고 해서 내가 반집 지는 수순이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선수를 두지 않고 후수를 두는 거다. 끝내기를 그런 식으로 하는걸 나는 여지껏 본적이 없다. 아마추어 10급도 그렇게는 안 둘 거다. 그 덕분에 9연승을 할 수 있었다. 자력으로는 안되는 거였다. 


 마지막 9번째 상대는 마샤오춘 9단이었는데 당시엔 세계 최강 전성기를 구가했다. 최종국에서 붙었는데 의외로 쉽게 이겼다. 그날은 바둑이 아주 잘 풀렸다. 당시엔 내가 중국기사 천적 소리를 좀 들었다. 그때는 중국 바둑이 기본기가 약했다. 나도 기본기가 약하고 중국 기사들도 기본기가 약하니까 실전에 강한 내가 좀 더 유리했던 것 아닌가 싶다. 


서봉수 9단의 진로배 9연승 신화가 세워진 대회인 97년 제5회 진로배 대국장면.왼쪽이 서 9단,오른쪽은 일본의 요다 9단.


 -20년 전에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바둑에 신이 있다면 그의 눈에는 승부수니 기세니 하는 애매모호한 말은 전부 가소로운 것들로 비춰질 것이다. 신의 눈에는 오로지 정수와 악수 밖에 없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그걸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지난 3월 9일 이 9단이 인공지능 알파고와 첫 대국에서 불계패한 걸 보고 언론인터뷰에서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면서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기는 걸 보고 충격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고 말했다. 당시 느꼈던 놀라움이 지금도 가시질 않는다. 알파고 실력이 그 정도일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전투력은 이 9단같고 계산력은 이창호 9단같았다. 알파고 기력을 당할 수가 없다. 처음엔 나도 4개월 전 기보만 보고 이 9단이 쉽게 이길거라고 생각했다. 4개월만에 그렇게 발전하다니


 2001년에 가로수 닷컴 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인공지능과 9점 접바둑을 둔 적이 있다. 인공지능이라고 해봐야 입력해놓은 것만 따라 하는 수준이라 생각해서 일부러 ‘사수’(꼼수)를 둬서 시험해봤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수에 컴퓨터가 실수를 계속해서 손쉽게 이겼던 적이 있다. 당시 내가 이겼던 인공지능 기력이 9급 정도였다.  그런데 15년만에 이 9단을 이길 정도로 발전한 셈이다. 알파고가 바둑계에 던진 충격 가운데 하나가 정석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얼핏 이상하다 싶은 수를 둬도 이제는 ‘정석에도 없는 수를 뒀다’는 식으로 누가 뭐라고 하질 않는다. 한마디로 정석이 없는 시대다. 자만하지 말고 계속 공부하는 것 말고 무슨 답이 있겠나 싶다. 


 -나는 영원한 학생이다. 체력이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는 계속 바둑을 배운다. 바둑은 공부할수록 계속 는다. 내 바둑은 계속 늘고 있다. 지금도 틈날 때마다 한국기원에 와서 연수생들 틈이 껴서 공부를 한다. 모르는게 있으면 물어본다. 나이차이가 50년은 나는 새까만 후배들이지만 실력은 수준급이니까 배울게 있으면 배우는거다. 


 -사람들이 조 국수랑 나를 많이 비교하곤 했다. 굳이 내 방식으로 비교한다면 그는 천재형이고 나는 바보형이다. 조 국수는 순발력이 뛰어났다. 계산이 엄청나게 빠르다. 나는 보통사람이니 평범하게 꾸준하게 노력했다. 내가 농담으로 말하는게 ‘조 국수 샌드백 구실했다’는 것이다. 경쟁관계라고 말을 많이 하지만 사실 전적은 압도적으로 조 국수에게 밀린다. 


 조 국수와 내가 다른게 또하나 있는게 조 국수는 이창호 9단을 제자로 키웠는데 나는 제자를 키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자를 키우려면 바둑 도장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나는 그러질 않으니까. 제자 키우는 건 아마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저 눈 감는 날까지, 체력 되는 날까지 바둑을 두면서 살다가 죽는게 소원이라면 소원이다. 



 -세계 바둑계는 한국과 중국, 일본이 주도한다. 세 나라가 고루 발전하며 경쟁하는게 제일 좋다. 일본이 예전같지 않은게 안타깝다. 큰 바둑대회만 해도 요즘은 한국과 중국에서만 개최한다. 그건 한국 바둑계한테도 좋지 않다. 일본이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보면 쇄국정책, 문을 열지 않아서 뒤쳐진 게 아닌가 싶다. 한국 바둑 역사를 나눠본다면 1대 조남철, 2대 김인, 3대 조훈현, 4대 이창호라고 할 수 있다. 5대는 아직 없다. 이세돌일지 박정환일지 아직 확신이 안선다. 확실한 1인자가 없다. 최상위권 그룹은 형성돼 있는데 예전처럼 독주하는 사람은 없다. 


 -앞으로 내 목표는 건강하게 즐겁게 살자는 것이다. 즐겁게 살면서 바둑도 즐겁게 두자는 뜻에서 ‘樂心’을 부채에도 써놨다. 술은 거의 안한다. 젊어서는 승부욕이 강하다보니 대국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대국 전날은 밥도 못먹을 정도였다. 나이를 먹으니까 즐겁게 하게 된다. 젊어서는 어떻게하든 이기려고 죽기살기로 했는데 그러다보니 건강에 안좋더라. 


 타이틀 우승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라 본다. 시니어리그 쪽에선 아직 우승 가능성이 있으려나. 젊은 친구들이랑 붙어서는 이기기 힘들더라. 여류기사이랑 붙어도 거의 진다. 시간이 좀 더 있으면 버티겠는데 순발력이 약해서 속기로는 잘 안된다. 시니어와 젊은 기사 두면, 6시간은 할 수가 없고. 3시간 정도 하면 큰 실수 하지 않고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알파고랑 대국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 혼자서는 힘들겠고, 전세계 바둑 고수들을 모아서 힘을 합쳐 알파고에 도전하는 거다. 알파고 실력을 보면 그렇게 해야 공평하다. 알파고는 컴퓨터 1000대 이상 묶어서 하는데 사람도 머리를 맞대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신 프로기사들 여럿이 함께 하면 의견이 안맞을 수 있으니 내가 참여해서 수 결정할때 의견 안맞는거 조정해주는 역할을 한다면 어떨까. 한마디로 내가 중재자로서 참여하는 거다. 

 


서울신문 2016년 6월16일자 기사.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19> 바둑도, 인생도 9단 ‘토종 승부사’ 서봉수

인터뷰는 6월9일 한국기원에서 했다. 사진은 이언탁 서울신문 기자가 찍은 걸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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