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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1 11:15

아버지 잃은 딸이 말하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눈물


 “지 애비 잡아먹은 년”이라는 말은 아무리 아들 잃은 어미가 내뱉었다고 하더라도 여덟살 어린 여자아이가 듣기엔 너무 가혹한 저주였다. 할머니한테 들었던 한마디는 60년이 넘은 지금도 예리한 칼날로  이희자(72)씨의 가슴을 후벼판다. 아버지가 강제징용됐을때 이씨는 생후 13개월밖에 안된 갓난아기였다. 지금도 이씨는 아버지 얼굴조차 모른다. 1989년이 되어서야 강제동원 피해자 단체에 참여하며서 바닷가에서 바늘 찾는 심정으로 아버지 흔적을 찾아다녔다. 어느날 그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이자,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의 산 증인이 돼 있었다.


 이 대표는 강화도가 고향이다. 아버지 이사현씨는 23세이던 1944년 강제징용됐다. 편지는 딱 한번 왔다. 외삼촌이 기억하는 편지 내용은 이랬다. ‘전쟁중이고 부대가 계속 이동중이다. 이 편지 발신지로 답장을 해도 소용이 없다. 나중에 다시 편지하면 그곳으로 답장을 보내라.’ 발신지는 중국이었다. 그 후 소식이 끊겼다. 죽었다는 통지서가 없으니 말그대로 행방불명이었다. 어머니와 이 대표 모두 전쟁이 나던 1950년까지도 아버지가 돌아올 거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버지만 돌아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징용가던 날 어머니는 친정으로 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나를 안고 처가로 가서 어머니를 2년만 보살펴 달라며 맡겼다고 합디다. 시댁살이 고생할까 봐, 딸이라고 구박받을까봐 그랬다고 해요. 그때부터 외갓집에서 살았습니다. 만약 내가 아들이었다면 상황이 완전히 달랐겠죠. 어머니는 친정에 갈 필요도 없었고 나는 대를 이을 맏이라고 할머니한테 사랑을 받으며 컸겠죠. 전쟁이 나고 아버지가 살아돌아온다는 희망을 버리게 되니까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친가에 가서 돌아와서 살게 해달라고 하니 할머니가 막 욕을 하더라고요. 아버지와 지내던 방은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쫓겨났죠.”


 이 대표는 나중에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들을 많이 만나면서 자기만 그런 말을 들었던게 아니란 걸 알게 됐다고 한다. 남편을 잃었으면 ‘지 서방 잡아먹은 년’이란 소릴 듣고, 아버지를 잃었으면 ‘지 애비 잡아먹은 년’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 대표가 나중에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할머니를 다시 찾아갔을때도 할머니는 입학원서에 보호자 도장을 찍어주길 거부했다. 결국 이 대표는 최종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 됐다. 이 대표는 “다 아버지가 없어서 그런게 아닐까 싶어 서러웠다”고 했다.


 안으로만 삭이면 상처를 이 대표는 강제동원 희생자 운동을 시작하면서 치유할 수 있었다. 1989년 7월부터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엔 운동을 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자식으로서 아버지 흔적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넘겨준 사망자명부를 뒤지고 뒤지다 1992년 드디어 아버지 이름과 주소지 기록을 찾았을때 기쁨을 이 대표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명부에는 “중국 광서성 전현 181부대 101중대 181병동에서 1945년 6월11일 전병사(戰病死)”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1997년 두번째 기록을 찾았다. 아버지 위패는 일본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었다. “억울하고 분해서 온 몸에 피가 멎는 느낌이었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죠. 어머니가 할머니한테 들었던 험한 말이 떠올랐어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면서 유족들에겐 알리지도 않았다는 게 기가 막혔습니다.” 다른 유족들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이 일은 이 대표가 더 열심히 강제동원 희생자 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이 대표로선 평생 이뤄야 할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오랫동안 일본을 상대했지만 일본에 대한 감정은 복합적이다. 한국보다 더 열심히 강제동원 희생자들을 위한 운동을 하는 일본인도 많이 만났고 그들에게 받은 도움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양심있는 일본분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나 스스로 상처를 조금씩 치유한다”고 표현했다. 가령 ‘재판지원회’라는 단체 회원들은 한국에서 일본을 방문할때는 안내와 통역은 물론 숙식까지도 도맡아 처리해주면서도 자신들이 한국에 올때는 무조건 모든 비용을 자비로 처리한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 정부한테 더 화가 납니다.” 그는 “아버지 위패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한국 정부는 도대체 지금까지 뭘했느냐 항의하고 싶었다”면서 “일본 정부 도와주는 꼴이 될까 지금까지 참아왔지만 이제는 할 말은 해야겠다”고 했다. 이 대표는 “한일협정 때 받은 돈으로 경제발전했는데 이제껏 강제동원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시설 하나 없는게 현실”이라면서 “강제동원으로 인한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시설 마련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 대해 날 선 비판을 쏟아냈다.


 이 대표는 “소송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면 사생활보호라느니 ‘소송에 정부가 동조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온다”면서 “강제동원 기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위원회가 기록을 찾아줬느냐 하면 그것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2010년 이후 4차에 걸쳐 기간이 연장되는 등 줄곧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던 위원회는 오는 6월 활동을 마칠 예정이다.


▲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지난 14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강제징용 이후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에 뛰어들게 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116005002


강제동원 확정 판결 미루는 대법… 고령 피해자들 “눈감기 전 내렸으면”


일제강점기에 발생했던 강제동원은 1942년 ‘조선인 노무자 활용에 관한 방책’이 각의를 통과한 것에서 비롯됐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생활환경, 철저한 감시 속에서 노예 취급을 받았다. 당초 약속했던 ‘계약 기간 2년과 월급’도 휴지 조각이 됐다. 미지급 급여는 이후 공탁됐고 각종 연금과 보험은 지금도 일본 각 지역 후생연금보험기구에서 관리하고 있다.



피해자와 유족들이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를 배상하고 미불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엔 일본 법원에 소송을 했지만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해 권한이 상실됐다는 등의 이유로 기각 판결을 받았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그 뒤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2심에서는 기각됐지만 마침내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은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소송에 대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2013년에는 고등법원에서도 원고 승소 판결이 나왔다. 문제는 일본 측이 재상고한 뒤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내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소송 대리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장완익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지난해 연말에는 판결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며 “90대를 바라볼 정도로 고령인 원고들로서는 하루가 급하다”고 말했다.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소송은 원고가 모두 사망해 유족들이 이어받아 진행 중이고, 신일철 소송도 원고 4명 중 2명은 사망했다.


대법원이 3년 전 판례를 스스로 뒤집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일반적인 예측이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선 3년 전과 같은 취지로 확정판결이 나온다면 일본 침략의 법적 성격에 대한 최초의 사법적 판단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장 변호사는 “한국 정부는 오히려 강제동원 문제 등이 해결됐다는 입장이었는데 그걸 다시 판단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외교정책 자체를 재검토해야 할 것”이라며 “문제는 한국 정부가 제대로 준비를 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강제동원 판결에 미온적이라는 비판은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그동안 보여 준 행태 때문에 더 증폭되고 있다. 장 변호사는 “피해자 규모를 정확히 알면 일본 기업 측과 협상을 통한 해결을 모색할 수 있을 텐데 위원회가 개인정보라는 점을 들어 비공개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위원회에 질의하자 위원회는 서면답변서를 보내왔다. 위원회는 현재 진행 중인 소송에 대해서는 “피해 당사자와 법정 대리인이 정보공개를 신청하거나 법원의 제출 요청이 있을 경우 관련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장 변호사는 “피해 당사자에게 자료를 제공하는 것은 예전부터 정부가 하던 일이고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위원회 서면답변 일부

위원회 서면답변 일부

150113 위원회개요 및 소송 대응(서울신문 취재요청).pdf




*2015년 1월16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삼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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