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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사해

프랑스는 말리 내전을 말릴 수 있을까

by betulo 2013.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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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리비아에선 동부를 중심으로 무아마르 카다피에 대항하는 내전이 발발했다. 1969년부터 시작해 42년이나 최고권력자 자리를 지키던 무아마르 카다피는 반군에 맞서기 위해 용병들을 긁어모았다. 사하라사막 남단 말리를 중심으로 알제리와 니제르 등지에 사는 유목민인 투아레그 부족 전사들이 계약금 1만 달러에 일당 1000달러를 받고 전장에 나섰다. 이들은 프랑스와 미국 등이 군사개입에 나서며 패색이 짙어지자 카다피가 지급해준 각종 무기를 들고 흩어져 버렸다. 결국 카다피는 10월20일 동부에 있는 지중해 연안도시 시르테에서 반군에 체포돼 끌려가다 총에 맞아 죽었다. 


용병들 실업자돼 귀향한 뒤 내전 불길


  카다피가 죽은 직후인 10월26일 실업자가 된 용병 출신 투아레그 병사 400여명이 선발대로 말리 북동부 도시 키달에 모습을 드러냈다. 차량 78대에 견착식 미사일과 기관총, 박격포같은 무기를 잔뜩 싣고 왔다. 이들을 중심으로 다음해 1월 투아레그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말리 정부군이 출동했지만 3월에 정부군이 보급상황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아마두 투마니 투레 대통령을 퇴임시켰다. 혼란을 틈타 알카에다 북아프리카 지부(AQIM)와 반정부 이슬람운동단체인 ‘안사르 디네’ 등이 투아레그 반군과 손을 잡았다. 


http://www.washingtonpost.com/world/up-in-arms-in-northern-mali/2012/12/03/682c76e0-3d8e-11e2-ae43-cf491b837f7b_graphic.html




  실전으로 단련된 이들은 중세 말리 제국의 수도이자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팀북투까지 차지했다. 안으로는 무지막지한 근본주의 종교독재를 펼치고 밖으로는 올해 초부터 남부로 세력을 확장하며 말리 정부를 밀어붙였다. 급기야 디온쿤다 트라오레 대통령 권한대행은 수도 바마코에서 1월11일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같은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파병을 선언했다. 경기침체로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3500명이나 되는 군인들을 보냈다. 한국인 대다수에겐 이름조차 생소한 ‘말리’라는 나라가 국제뉴스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프랑스, 말리에 경제·안보 이해관계


  올랑드는 말리 북부를 장악하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들과 싸우는 것을 공식적인 파병 목적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프랑스는 20세기 중반까지 말리를 포함해 아프리카 각지에 광대한 식민지를 거느렸다. 식민지들이 독립하고 난 뒤에도 프랑스는 군사개입과 독재정권 지원, 자원수탈로 여러 차례 논란을 일으켰다. ‘아프리카 경찰국’이란 별명까지 붙었다. 거기다 말리는 제대로 개발하지 않은 에너지 자원 보고다. 프랑스 원자력 에너지 원료인 우라늄이 주로 나는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 국내정치 요인도 감안해야 한다. 2012년 5월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현직 대통령이었던 사르코지를 이기고 사회당 정권교체를 이룬 올랑드는 취임 이후 국민들의 지지를 모으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많은 외신은 카리스마가 부족한 무기력한 대통령이라는 혹평을 받던 올랑드가 말리 내전 개입을 통해 강력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려 한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첫단추는 꽤 잘 꿰었다. 아프리카 문제에 외세가 개입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던 알제리는 프랑스 공군이 말리에 가기 위해 자국 영공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했다. 튀니지도 지원 대열에 동참했다. 영국, 독일, 미국을 포함해 나토(NATO) 회원국들이 프랑스를 지지한다며 수송기와 인력,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유엔도 프랑스를 지지하고 나섰고 아프리카연합도 군대 파병으로 화답했다. 국내에서도 75%가 파병 결정을 지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다. 일부를 빼곤 좌파· 우파·극우파 모두 파병에 힘을 실어줬다.  


순조롭게 승승장구, 문제는 이제부터


 프랑스군은 말리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다. 프랑스군과 말리군은 3주만에 북부 주요 도시를 탈환했다. 가오와 팀북투에 이어 1월30일에는 별다른 저항 없이 바마코에서 북쪽으로 1500㎞ 떨어진 키달 진입로와 공항까지 장악했다. 주로 차드에서 온 아프리카 국가 군대들도 이미 군사개입에 들어갔다. 겉으로는 상황이 나쁘지 않다. 올랑드는 2월1일 바마코를 깜짝 방문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공공서비스, 교육, 보건, 문화유산 등 재건 지원을 약속했다. “프랑스는 얼마나 걸리든 아프리카군이 우리를 대체할 수 있을 때까지 여러분 곁에 있겠다”는 사탕발림도 잊지 않았다.(올랑드, 말리 깜짝 방문… 지속적 군사·재건 지원 약속


 프랑스 정부로서는 신속하게 작전을 마치고 철수하는 것이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일 것이다. 하지만 반군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걸 잊으면 안된다. 도시에서 철수한 투아레그 반군 4000여명은 대부분 북부 산악지대 동굴에서 전열을 정비하며 게릴라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사막지역에 익숙하다. 말리와 알제리, 리비아는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사하라 사막에서 국경선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프랑스군과 임무교대를 해야할 아프리카연합은 예산부족으로 약속했던 6000명 파병을 못하고 있다. 말리에 투입된 아프리카 지원군 2000여명은 대부분 아프리카연합과 별도로 움직이는 차드군이다. 


 더 큰 문제는 프랑스에 맞선 보복테러 위협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프랑스가 내전에 개입을 선언하자마자 소말리아에 억류돼 있던 프랑스 정보국(DGSE) 소속 드니 알렉스가 살해됐다. 1월16일에는 알제리 석유시설에서 대규모 인질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장 암울한 시나리오는 말리가 ‘작은 아프가니스탄’이 되는 경우다. 프랑스 툴루즈대 이슬람학연구소 마티유 귀데르 교수도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리 반군이 후퇴한 것은 전술적 결정일 뿐”이라고 말했다. 돈 야마모토 미 국무부 아프리카 담당 부차관보도 “프랑스의 개입은 이제 시작일 뿐으로 (반군 퇴치는) 수 년이 걸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예일대 석좌교수인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논평을 통해 “말리는 아프가니스탄과 상황이 크게 달랐지만,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보면 또 다른 아프가니스탄이었다”라면서 “올랑드의 ‘용감한 결정’은 아마도 ‘올랑드의 끔직한 결정’이 될 것 같다”고 꼬집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나? 누구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놓고 미국에서 벌어졌던 논쟁이 프랑스에서 재현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이 지지하던 현지 정부에 모든 걸 넘긴다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까? 그리고 우리는 지지한 이들이 정말로 ‘착한 편’일까? 수 차례 사례를 통해 드러난 바와 같이 남의 나라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쉽다. 그들을 다시 빼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철군이 시행되면 말리는 예전처럼, 외국군이 오지 않았을 때보다 좋아질까, 나빠질까? 이는 (파병 찬성으로) 마음을 돌리기 전인 한 달 전 알제리 정부의 조언이었다.”


  반군 수십명은 10일 북동부 최대 도시인 가오를 공격했다. 이들은 가오 시내를 관통하는 니제르강을 따라 카누와 오토바이를 이용해 시내로 진입했다고 한다. AFP통신에 따르면 이날 전투는 프랑스군과 말리군이 가오에 진입한 뒤 벌어진 첫 시가전이다. 말리 내전이 게릴라전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프랑스군은 최근 반군이 숨어 있는 북부 산악지대에 20여 차례 공습을 퍼부었다. 하지만 험준한 산악 속 동굴에 숨어있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고 한다. 이 지역은 외국군에겐 무척이나 낯설다. 하지만 반군에겐 익숙한 지역이다. 이곳에 사는 유목민들한테서 필요한 물품도 공급받을 수 있다. 


 복잡하기만 한 말리 내부 종족 상황은 말리를 더 큰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위협요소다. 투아레그를 비롯해 다양한 종족들로 이뤄진 말리는 남부와 북부간 대립과 반목도 심하다. 북부는 피부색이 상대적으로 밝은 투아레그와 사하라 아랍계가 대부분이고 남부는 더 어두운 피부색이다. 쿠데타 이후 지휘 명령 체계가 무너졌고 하극상이 만연해 있는 정부군은 상당수가 남부 출신이다. 벌써부터 말리군이 반군과 연대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북부에서 무차별 학살에 관여했다는 고발이 인권단체에서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월러스틴은 “프랑스가 이 전투에 남아 있는 암묵적 이유 중 하나는 말리군을 통제하는 데 있다”고 꼬집었다. 


 1990년대 이후 민주화를 통해 성장한 시민사회와 정치권은 사사건건 의견이 엇갈린다. 보수적 이슬람 종교인들은 여성 차별을 내용으로 하는 가족법을 도입하고 종교부를 신설하고 주장하는 등 정치개입이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군부 지도자 아마두 사노고는 로빈 후드라도 되는양 행동한다. 월러스틴은 그나마 “프랑스 파병으로 말리 군부의 쿠데타 지도자들에 대항하는 민선 대통령의 힘이 강화될 것이다. 이는 프랑스와 모든 동맹국이 원하는 바다.”라고 지적했지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디온쿤다 트라오레 대통령 권한대행은 정치적 야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1968년부터 1991년까지 집권했던 무사 트라오레 전 대통령의 사위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사 참조)


찬란했던 말리제국, 혼란속 말리


 많은 한국인들에게 사하라 이남 서아프리카는 낯설기 짝이없는 지역이다. 원시부족으로 살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갔고 프랑스 식민지로 수백년을 지내다 어찌어찌 독립한 가난한 나라 정도가 전형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립 이후 나라 이름을 말리로 한 것은 한때 번영을 누렸던 말리 제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팀북투를 수도로 했던 말리제국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전체 황금생산량 가운데 3분의 2를 차지했던 황금제국이었다. 


 말리제국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보여주는 두가지 사례가 있다. 14세기 말리를 다스리던 ‘만사 무사’는 재산이 지금 기준으로 약 436조원(4000억달러) 가량이었다. 그는 1312년부터 1332년까지 통치하면서 ‘이 시대에 가장 부유한 남자’ 라고 불렀으며, 메카에 순례할 때에 노예 1만 2000명, 아내 800명, 황금 11톤을 싣고 갔다. 그가 가는 곳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황금을 나눠주는 바람에 황금 가치가 폭락하면서 지중해와 서아시아 일대에 극심한 경제혼란이 발생했다고 한다. 


 팀북투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가운데 하나인 상코레대학이 있다. 만사 무사가 전폭적으로 지원해준 덕분에 이 대학 도서관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으로 많은 책을 소장한 도서관이 생겼다. 40만~70만권이나 되는 책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 대학은 한때 오늘날 뉴욕대학보다도 외국 학생 비율이 많을 정도로 학문 중심지로 국제적인 명성을 누렸다.


 프랑스군과 말리 정부군은 1월28일 팀북투에 입성했다. 10개월 동안 이 도시를 장악했던 반군이 달아나면서 고대문서 보관소에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말리 정부가 반군이 팀북투를 장악하기 전에 고문서 대부분을 비밀 장소에 옮긴 덕분에 잿더미가 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이번에 화마(火魔)를 피한 아메드 바바 도서관에서 보관하는 고문서만 해도 30만점이 넘는다. (말리 내전 '소실' 고문서는 '인류의 문화유산')  인류가 간직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려면 하루빨리 내전이 평화롭게 끝나야 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누구도 자신있게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이븐 바투타가 목격한 말리


역사상 세계 최고 여행가라면 역시 이븐 바투타를 꼽을 수 있다. 그가 여행한 곳을 살펴보면 마르코 폴로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다. 이븐 바투타는 1352년부터 1353년까지 사하라를 건너 말리를 여행했다. 그가 전한 말리는 어떤 모습일까. 정수일이 완역한 '이븐 바투타 여행기'에서 발췌 인용한다. 


"흑인들은 군주에게 가장 잘 순종하고 무조건 굴종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슨 선서를 할 때면 꼭 쑬퇀의 이름으로 한다." (404)


  "흑인들의 선행으로는 부정이 적은 것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부정을 가장 적게 저지르는 사람들로서 쑬퇀은 그 누구도 추호의 부정이라도 저지르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여행자건 상주자건 도둑이나 약탈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들의 선행으로는 또한 그곳에서 사망한 백인의 유산을 범접하지 않는다는 점도 들 수 있다. 망자에게 유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믿을 만한 백인의 손에 맡겨두었다가 합법적인 상속인이 수취하도록 한다." (410)


  "그들의 추행(醜行)으로는 시녀나 종비, 어린 처녀들이 나체로 치부를 드러내놓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일을 들 수 있다."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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