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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4 17:19

중국-홍콩 '한 나라 두 체제' 15년



렁춘잉(梁振英) 새 홍콩  행정장관이 7월1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에게 취임 선서를 하고 임기를 공식 시작했다. 이날 홍콩에서는 40만명이나 참가하는 대규모 거리 행진이 벌어졌다. 1997년 주권반환 기념일인 7월1일은 해마다 거리행진이 벌어지지만 이날 행진은 2004년 이래 최대 규모였다. 렁 장관에 대한 반감이 시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렁춘잉은 취임 직전 자택에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불법 구조물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올해 초 행정장관 선거 운동 때 유력 후보였던 헨리 탕의 집에 불법 구조물이 있다는 점이 드러나 곤욕을 치렀고 당시 렁 후보는 자기 집에는 불법 구조물이 없다고 밝혔다. 

취임 다음날인 2일에는 홍콩 기자협회가 홍콩 기자 66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가 나왔는데 렁춘잉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반영한다. 응답자 중 59.6%가 렁춘잉 정부에서 언론 자유가 '많이' 혹은 '상당히' 제약될 것이라고 답했다. 

렁춘잉은 누구이며, 무슨 일 때문에 임기 시작과 동시에 이렇게 시끌시끌한 것일까? 그 배경을 홍콩 현대사 맥락 속에서 살펴봤다. (원래는 4월 초 쓴 글인데 블로그에 올리는 걸 잊고 있었다. 당시 글을 조금 손봤다.)

(AP=연합뉴스) 홍콩주권반환 15주년 기념식과 렁춘잉 신임 홍콩장관 취임식이 있었던 1일(현지시간) 수만명의 홍콩 시민들이 중심거리를 메운 채 민주화 행진을 하고 있다. 이들은 이날 최근 의문사한 반체제인사 리왕양의 사인규명, 톈안먼 민주화 시위 재평가, 직접선거 등을 요구했다.




 지난 3월25일 홍콩에선 독특한 선거가 열렸다. 홍콩 인구는 700만명이 넘지만 선거권을 가진 건 전체 인구의 1000분의 1도 안된다. 공상(工商)·금융(金融)계 300명, 전문직계 300명, 노동·사회복무(서비스)·종교계 300명, 입법회 의원 등 정계 300명 등 선거인단 1200명이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특별행정구’를 5년간 이끌 행정수반인 행정장관을 뽑는다. 그나마 지난번 선거 당시 선거인단 800명에서 늘어난 규모다.


 선거에서는 홍콩정부자문기구인 행정회의 소집인(의장)을 지낸 렁춘잉이 당선됐다. 올해 쉰 여덟인 그는 유효표 1132표 가운데 689표를 얻었다. 물론 이변은 없었다. 중국의 지지를 얻는 렁춘잉이 당선되는 건 따논 당상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초 예상보다 훨씬 많은 표를 얻었다는 점은 생각해볼 만하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해 결선투표까지 가거나 기껏해야 턱걸이로 당선될 것이란 예상이 적지 않았다.


 렁춘잉 행정장관은 7월1일부터 2017년 6월30일까지 임기를 수행한다. 중국 정부는 당초 현직 행정장관이자 친중국 성향이 강했던 헨리 탕과 렁춘잉을 놓고 저울질을 했다. 하지만 탕 장관은 임기 말에 혼외정사와 호화 불법 주택 개조 등 추문이 잇따라 터지면서 자멸했다. 렁춘잉은 선거운동 기간 물가안정, 공공주택 건설, 서민생활 향상 등의 민생개선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고 중국의 지지까지 얻었다.


 렁춘잉은 중국 산둥반도 맨 동쪽에 위치한 웨이하이에서 건너온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말단 경찰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엔 경찰숙소에서 지냈다고 한다. 홍콩이공(理工)학원을 졸업한 뒤 전문 측량기사로 일하던 도중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웨스트 잉글랜드 대학에서 상업관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콩으로 돌아온 뒤에는 측량과 부동산 컨설팅 일을 했으며 다국적 부동산컨설팅 회사인 DTZ 아시아·태평양지구 회장까지 올랐다. 그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85년 홍콩기본법 자문위원을 맡은 게 계기가 됐다. 1996년 홍콩임시입법회 의원으로 당선됐고 1999년부터 최근까지 홍콩정부 자문기구 성격인 행정회의 소집인(의장)을 맡았다.

 중국 국무원은 3월28일 원자바오 총리 주재로 전체회의를 열어 렁춘잉에게 행정장관 임명장을 줬다. 원자바오는 이 자리에서 중국 중앙정부는 ‘일국양제’와 ‘항인치항’(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린다)는 원칙을 견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럼에도 이번 선거는 선거인단 대다수가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인물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중국 정부가 홍콩에 미치는 영향력이 밖에서 보는 것보다 결코 작지 않으며 앞으로도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점을 각인시켰다.

홍콩, 중국이지만 중국과는 또 다른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지 올해로 15년을 맞는다. 그동안 중국 정부는 홍콩에서 정치경제에서 착실하게 헤게모니를 장악해 가고 있다. 반면 이에 따른 언론자유 위축 등 시민권 위축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고 있다. 1997년 이후에도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어가고 있고 아시아 금융중심지로서 위상도 탄탄하지만 상하이 등 중국 연안지역이 성장하면서 홍콩이 누리는 금융 경제 중심지로서 위상이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불안요소다. 갈수록 확대되는 빈부격차와 급등하는 물가와 집값도 심각하다. 홍콩 집값은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평가를 받는다. 렁춘잉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최저임금제 개선 등 사회안정책을 내세우지만 재계 반발 때문에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여러모로 홍콩은 중국에 속하면서도 중국과는 다른 정치사회적 맥락을 유지한다. 각종 국제 체육대회에 중국과 별도로 출전하는 것은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바로 ‘1국 2체제‘, 이른바 일국양제(一國兩制)가 있기에 가능한 모습이다. 중국 정부는 영국한테서 홍콩을 반환받기로 하면서 50년 동안 홍콩 체제를 인정하겠다고 천명했다. 중국 영토로 돌아갈 경우 민주주의가 급격히 훼손될 것을 우려하는 홍콩인들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준 셈이다. 그럼에도 중국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홍콩 입장에선 독자성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 독자성을 유지하기는 해야 하는건지, 정치적 민주주의를 어떻게 유지할지 여러 측면에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중국은 공공연하게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일국양제, 곧 1국 2체제 유지가 명분이다. 이번 선거 역시 다르지 않다. 제도적 민주주의를 착실하게 발전시켜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홍콩 시민들 입장에서 15년 전 중국이 홍콩을 반환받은 뒤 민주주의가 훼손된다는 것은 상당히 예민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

 4월1일 벌어진 시위는 이런 기류를 잘 보여준다. 시위대 추산 1만 5000여명, 경찰 추산 5300여명에 이르는 시위대는 지난달 행정장관 선거에서 중국 당국이 선거인단에게 압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보기에 이는 명백하게 ‘1국 2체제’ 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시위에 참가한 한 시민(69세)은 “중국이 주제넘게 우리 선거에 간섭했다. 렁춘잉은 중국의 예스맨이 될 것이 뻔하다.”고 우려했다. 선거 직전인 3월3일에는 직접선거를 요구하는 시위도 있었다. 홍콩 시민 5000여명, 경찰 추산 3000여명은 주로 친중국 성향 인사로 이뤄진 1200명만으론 진짜 선거가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홍콩에선 정치적 문제로 대규모 시위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지난해 7월1일에는 홍콩의 독자성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범민주파 시민단체인 민간인권진선(民間人權陣線, 약칭 民陳)이 주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적도 있다. 1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가해 도널드 창 행정장관 퇴진을 촉구했다.

홍콩 범민주파 정치인들과 시민단체들은 매년 7월 1일 빅토리아공원에서 민주주의 확대를 요구하는 거리행진을 한다. 이 날이 바로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날은 바로 국가안전법에 맞서 홍콩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던 날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2003년 7월1일 50만명이나 되는 홍콩 시민들이 홍콩판 국가보안법으로 불리던 국가안전법 제정 시도를 무산시켰다.

 홍콩 역사상 가장 많은 시민이 참가한 시위가 1989년 5월20일 발생했는데 100만명에 이르는 이들은 태풍 속에서도 한목소리로 천안문시위 참가자들을 지지한다고 외쳤다. 홍콩인들이 갖는 자의식이 어떤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런 속에서 많은 홍콩인들은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홍콩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중국인이라기 보다는 홍콩인으로 여긴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최근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설문조사가 더욱 중요한 것은 설문조사 그 자체보다도 중국 정부가 격렬하게 반발하며 과민반응을 보인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가 지난 3월12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이번 조사는 홍콩대 로버트 청 교수 연구팀이 수행했다. 그는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 이 조사를 계속해왔다. 그런데 지난해 말 조사에서는 중국 본토에 대한 반감과 '홍콩과 중국은 다르다'는 인식이 커진다는 점을 시사하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조사 결과를 보면 홍콩 반환 이후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다가 2008 베이징올림픽을 정점으로 감소 추세다. 이번 조사에서 자신을 주로 중국인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34%에 불과했고, 63%는 홍콩인의 정체성을 내세웠다.

 중국 정부측 관계자들과 공산당이 통제하는 언론들은 연구결과에 격하게 반응했다. 홍콩 주재 중국 연락판공실 고위관계자는 이 조사가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라고 말했다. ‘홍콩은 이제 중국의 일부이므로 주민들에게 정체성을 묻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이라는게 그가 내세운 근거였다. 홍콩 신문 문회보(文匯報)는 설문조사에 “나쁜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비난했다. 심지어 로버트 청에 대해 “검은돈을 받은 노예”이자 “홍콩인들을 동포와 떼어놓으려 한다.”고 공격했다.

 중국 정부가 단일국가 유지에 집착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티베트나 위구르 지역 독립운동에 대해 중국 정부가 보이는 반응은 거의 병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중국은 홍콩에 대해서도 ‘우리는 모두 중국인’이란 의식을 심고 싶어한다. 하지만 156년이나 영국 식민지배를 거치며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누려오면서 홍콩인들은 중국인이라는 성격 말고도 자신들을 특징짓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중국 정부 입장에서 대단히 불만스런 상황일 수밖에 없다. 홍콩인이라는 자의식이 중국 정부에겐 '역린'인 셈이다.

중국인인가 홍콩인인가

 1842년 아편전쟁에 패배한 청나라가 영국과 난징조약을 맺으면서 홍콩을 뺏겼다. 그전까지 보잘것없던 섬이었던 홍콩은 이제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된다.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 결과 주룽반도도 영국에 귀속됐고 1898년에는 홍콩과 인접한 북부 섬과 신 행정구역으로 알려진 신계까지 영국이 99년간 조차받았다. 이후 홍콩은 영국의 물산이 모이는 무역항이 됐다. 이런 역사적 맥락은 홍콩인들에게 '홍콩인'이라는 역사적 정체성을 심어줬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홍콩은 150년 넘는 역사의 한 장을 마감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 1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홍콩은 식민지였고 ‘중국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홍콩인들은 중국본토에서 정치경제적 이유로 건너온 난민들에서 기원한다는 독특한 역사도 중요한 변수다. 그렇다고 영국 식민지 시기에는 민주화가 잘 이뤄졌나 하면 그렇지도 않다. 집회시위나 민주선거 같은 기본적 자유권조차 1990년대 이전까지는 전혀 없었고 중국반환을 앞두고 10년도 안되는 시기에 시작됐다. 그런 자유조차 중국반환 이후 위협받으니까 사람들이 반발하는 측면이 강하다.

 홍콩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과거 금융과 무역 허브로 번성했던 홍콩은 점차 경제적으로는 상하이에 밀리고 정치적으로는 베이징에 종속된다. 표준중국어인 북경어를 쓰는 홍콩사람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애초 뿌리가 얕았던 ‘홍콩’이라는 정체성이 모래성처럼 흩어지는 조짐을 보인다는 진단까지 나온다. 하지만 적어도 정체성 혼란 속에서도 하나씩 하나씩 자신들의 역사를 일궈나가는 홍콩, 그리고 홍콩인들이 꾸려나가는 삶의 모습은 남북통일을 구성해 나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적잖은 고민꺼리를 던져준다.

2007/03/25 - [종횡사해/동아시아] - 홍콩, 중국의 벽에 갇힌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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