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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사해/한반도-동아시아

보시라이와 함께 사라져버린 '충칭식 경제발전'

by betulo 2012.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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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10월 중국 베이징에선 제18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자대회(당대회)가 열린다. 이 회의에선 총서기 겸 국가주석을 선출한다. 그리고 총서기와 함께 중국 공산당을 이끌 정치국 상무위원 9명을 선출한다. 쉽게 말해 향후 10년간 중국을 이끌 최고권력자들이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와중에 유력한 상무위원 후보였던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가 정치국 상무위원 후보에서 사실상 탈락했다.

중국 국가지도자들을 결정하는 것은 선거가 아니다. 공청단, 태자당, 상하이방 등 주요 파벌들 사이에 서로 총성없는 권력투쟁이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혁명 원로인 보이보 전 부총리의 차남이자 태자당 선두주자가인 보시라이(薄熙來)가 불과 몇 개월 사이에 권력 중심부에서 사실상 퇴출돼 버린 사건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권력투쟁과 치열한 노선갈등의 맨얼굴을 전세계에 드러내 보였다. 보시라이를 둘러싸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폐족(廢族)으로 굴러떨어진 태자당 선두주자

 보시라이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을 이해하려면 먼저 중국 공산당의 양대 파벌인 공청단과 태자당을 알아야 한다. 공청단 파벌은 현재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이자 국가주석인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 간부들이 주축이다. 태자당 파벌은 중국 혁명에 참여했던 혁명 원로의 자제들이 중심이다. 이들은 이미 차기 지도부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다.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한 보시라이(오른쪽)와 아내 구카이라이. 최근 구카이라이의 살인 의혹이 뒤늦게 불거졌다.(출처= 시사IN)


왕리쥔 사건 전까지만 해도 차기 지도부는 태자당이 우세했다. 태자당 소속인 시진핑 국가부주석이 차기 국가주석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 9명에 거론되는 공청단 파벌은 리커창 부총리, 류윈산 선전부장, 리위안차오 조직부장 등으로 과반수도 아닌 3명 뿐이었다. (류옌둥 국무위원은 두 파벌과 모두 인연이 있다.) 그러던것이 보시라이가 실각하면서 그 자리를 왕양 광둥성 당서기가 비집고 들어온다. 이렇게 되면 공청단은 과반에 준하는 비중을 확보하게 된다. 

 사실 차기 지도부에서 공청단이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된 데는 경쟁파벌인 태자당 소속인 보시라이가 그동안 충칭시에서 보여준 인상적인 업적이 자리잡고 있다. 2007년 충칭시 당서기로 된 것은 그전까지 다롄시장과 당서기를 거쳐 랴오닝성장, 상무부장까지 출세가도를 달린 보시라이로서는 좌천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태자당의 지원과 언론의 조명을 받긴 했지만 이른바 ‘충칭모델’을 성공시킴으로써 일약 상황을 반전시켰다.

극심한 지역불균형과 빈부격차, 부정부패로 몸살을 앓는 중국 현실에서 충칭모델은 상당한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공청단의 대표브랜드인 광둥모델보다도 더 호응을 받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시진핑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이 연이어 충칭을 방문했다. 공청단 입장에선 보시라이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보시라이가 실각하는 과정은 중국 정치에서 관례처럼 돼 있는 정적 제거 방식을 따랐다. 부패를 고리로 주변에서 중심으로 포위망을 집중시켜간다. 1995년 천시퉁(陳希同) 사건이나 2006년 천량위(陳良于) 사건 모두 비리에 덜미가 잡힌 측근을 압박한 끝에 정적의 부패를 확인하고 끝내 제거하는 순서로 이어졌다.

지난 2월6일 청두에 있는 미국 총영사관으로 망명을 기도했다가 실패하면서 보시라이 실각 파동의 단초를 제공한 전 충칭시 공안국장 왕리쥔(王立軍)은 바로 보시라이의 오른팔이었다. 그가 망명을 기도한 건 시진핑 국가부주석 미국 방문을 불과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왕리쥔은 1월28일 보시라이를 찾아갔다. 간부 비리를 조사하는 당 기율검사위원회가 자신을 압박한다며 구조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보시라이는 요청을 거부했다. 왕리쥔은 보시라이 가족비리를 무기로 거래를 제안했지만 이마저도 거부당했다. 

 보시라이는 2월2일 공안국장에서 해임했다. 말 그대로 토사구팽이었다. 왕리쥔은 혼자 죽을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보시라이와 통화한 내용도 녹음해두고 기밀서류도 챙겼다. 그리고 충칭에서 330㎞ 떨어진 청두에 있는 미국 총영사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미국은 그를 거부했다. 공청단과 보시라이는 서로 왕리쥔의 신병을 먼저 확보하기 위해 경쟁에 나섰다.

보시라이는 관련 규정까지 어겨가면서 충칭시 무장 경찰 병력을 청두로 파견했다. 공청단에서는 국가안전부와 인민해방군의 정보 담당 부서인 총참모 제2부가 움직였다. 국가안전부 쪽에서 왕리쥔을 확보했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2월9일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소집했다. 왕리쥔 사건을 중대 사건으로 규정하고 엄중하게 처리하겠다고 천명했다. 

 보시라이는 다급해졌다. 2월12일 “충칭은 (후진타오의 국정이념인) 과학발전관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보시라이는 새 공안국장에 공청단 파벌의 차기 대표인 리커창의 비서 출신인 관하이샹(關海祥)을 발탁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2월13일자 사설에 “일부 지방 간부가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사설을 실었다. 파벌 사이에 조정작업이 벌어졌다.

 3월9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기간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보시라이가 “사람을 쓰면서 관리에 소홀했다.”라고 인정하고 3월15일에는 충칭시 당서기직을 겸임하지 않는다고 발표한 것으로 볼때 당초 분위기는 보시라이가 당 정치국 위원직은 유지하는 대신 충칭시 당서기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봉합하기로 파벌간 타협했을 가능성이 있다. 공청단으로서도 보시라이가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는 걸 막고 그 자리에 공청단 소속을 진출시킨다면 적잖은 정치적 승리라고 할 만 했다. 

 전인대 이후 상황은 또 한번 요동쳤다. 4월10일 보시라이는 ‘심각한 기율 위반 혐의’로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자격을 박탈당한 채 조사를 받게 됐다. ‘부하 관리 소홀’에서 ‘개인 비리 등 중범죄’로 혐의도 달라졌다. 때마침 아내 구카이라이(谷開來)가 연루된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 사망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구카이라이는 전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부주임 구징성(谷景生)의 딸이다. 베이징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다.

 헤이우드 사망 직후 충칭시에선 사인을 과도한 음주로 결론내렸고 시신은 급히 화장했다. 공청단은 신병을 확보한 왕리쥔을 통해 이 사안에 대한 내밀한 정보를 확보했겠지만 한 달 넘게 이 사건은 전혀 공론화되지 않았다. 그동안 영국 정부가 재조사를 요구했지만 묵살하던 당국이 느닷없이 3월25일 재조사를 통해 타살로 결론을 내리고 구카이라이를 구속했다. 뒤이어 언론통제가 극심한 중국에서 구카이라이 불륜설과 비자금조정설 등 온갖 의혹보도가 줄을 잇는다. 

 주장환 한신대 교수(중국지역학)은 최근 시사IN에 기고한 글 ‘보시라이의 십자가 충칭모델’을 통해 조직적인 보시라이 죽이기의 원인으로 충칭모델을 지목했다. 보시라이를 비롯해 태자당은 정책논쟁에서 기선을 제압한 충칭모델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시진핑을 비롯해 정치국 상무위원 9명 가운데 5명이 충칭모델을 공개적으로 찬양했다.

 보시라이가 상무위원이 된다면 충칭모델은 곧바로 차기 지도부의 국정이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보시라이 역시 자신의 일부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충칭모델은 적극적으로 방어했다. 보시라이를 적극 비호한 것으로 알려진 저우융캉 저우융캉(周永康) 정치국 상무위원이 보시라이 면전에서 충칭의 성과를 긍정하는 발언을 했다. 다음날에는 보시라이가 기자회견에서 “충칭 모델을 흠집 내려 하는 세력이 있어서 화가 난다”는 발언까지 했다. 자신의 일부 잘못은 인정하되, 충칭 모델은 올바르다는 항변으로 해석된다.

 주장환은 바로 이 때문에 공청단이 충칭모델을 폐기하기 위해서는 보시라이를 완전히 제거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해석한다. 언제나 권력투쟁은 곧 담론투쟁인 법이다. 

 

보시라이보다 더 주목해야 할 건 충칭모델 

 지난해 11월25일 부산 동아대에서 열린 현대중국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성균관대 동아시아지역연구소 이홍규 박사가 발표한 ‘충칭 모델의 등장과 5세대 지도부의 정치적 비전’은 충칭모델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 논문에서 강조하는 충칭모델의 핵심은 마오쩌둥 어록 익히기나 홍색가요 부르기 같은 게 아니다.

 바로 국영기업을 사유화하는게 아니라 회생시킨 뒤 그 수익을 정부 재정으로 삼아 복지 투자를 늘리는 한편 민간 기업의 활력까지 북돋우는 시스템이다. 확실히 충칭은 최근 초고속 성장을 이어오고 있다. 2010년 기준 충칭의 GDP 증가율은 17.1%로 전국 2위, 증가 속도는 전국 1위다. 그럼에도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 폭은 전국 평균보다 0.4% 낮다. 이 모든게 상하이 같은 연안지역이 아닌 소외지역인 서부 내륙지역에서 일어났다.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한국 등에서는 공기업과 공공서비스를 사유화하고 자본시장을 개방하라는 워싱턴 컨센서스가 기승을 부렸다. 반면 충칭에서는 국유기업 부채를 지방정부가 일시적으로 떠안는 대신 구조조정을 단행해 민영화 없이도 국유기업을 살려낼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유기업이 견실해지자 지방재정도 풍부해졌다.

 이 재원으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온 농민공에게 임대주택을 제공하는 대신 농지 처분권을 확보했다. 도농격차를 해소할 길이 열린 셈이다. 그렇다고 충칭모델이 온전히 보시라이의 공적은 아니다. 이미 후진타오 주석은 2003년부터 충칭에서 새로운 정책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을 보시라이가 이어받아 꽃피운 것이다. 

이번 사건이 터지기 전만 해도 충칭모델은 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체할 수 있는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주장환은 차기 지도부 구성을 둘러싼 권력투쟁 와중에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중요한 정책대안이 묻혀 버리는걸 안타까워한다. “현재 벌어지는 권력투쟁의 끝은 보시라이라는 한 정치인의 정치 생명을 넘어 그의 실험, 즉 충칭 모델의 파산이다. 현재 중국 정계에서는 ‘보시라이=충칭 모델=문화대혁명과 같은 역사적 오류’라는 등식이 현실화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충칭모델이 애초 공청단 출신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충칭에서 대안적 경제발전을 실험하면서 나타난 모델이었다는 점, 그리고 실험을 위해 후진타오가 충칭시 당서기로 내려보낸 이가 역시 공청단 출신인 현 왕양 광둥성 당서기라는 점, 보시라이가 빠지는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바로 왕양이라는 점은 무척이나 아이러니다. 






12_0313(삼성경제연) 중국 지도부 교체와 2012년.pdf

12_0322(국회입법조사처) 제11기 5차 중국 인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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