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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

강제이주와 소련해체도 이겨낸 카자흐스탄 고려일보

by betulo 2010.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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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으로서 우리 민족을 위해 뭔가 일해 보고 싶었습니다. 가장 보람 있을 때요? 갓 나온 신문을 처음 펼쳐 봤을 때 우리 고려인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담겨있는 걸 느낄 때가 아닐까요.”

 카자흐스탄 경제중심도시 알마티 시내 동쪽 고리키공원 앞에는 ‘카레이스키 돔’이라는 건물이 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본부로 쓰이는 이 건물 2층에는 87년 역사를 가진 한글신문인 고려일보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 11일 오후 고려일보를 찾았을 때 김콘스탄틴 (33) 대표와 남경자(68) 부대표는 신문 마감을 끝내고 교정지를 살펴보던 참이었다.

고려일보의 역사를 알면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역사를 알 수 있다. 19세기 말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하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한글신문과 잡지가 속속 창간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초에는 17개나 되는 신문 잡지가 발간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매체가 바로 1923년 창간된 ‘선봉’이었다. 하지만 1937년 소련 정부가 17만여명에 이르는 고려인들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시키면서 한글매체들은 철퇴를 맞았다.

강제이주와 소련해체도 견뎌낸 민족언론

 다행히 신문 활자를 챙겨 온 선봉 편집위원 한 명이 여러 차례 당국에 청원한 끝에 1938년 ‘레닌기치’란 이름으로 한글신문을 다시 낼 수 있었다. 레닌기치는 소련 전역에서 구독할 수 있는 유일한 한글 신문이었다. 주6회로 4만부나 발행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소련이 해체되자 레닌기치는 1991년부터 ‘고려일보’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시작을 모색했다. 하지만 재정난이 심해지면서 주1회 발행으로 바꿨음에도 여러차례 폐간 위기를 넘겨야 했다. 다행히 카자흐스탄 정부가 소수민족 지원 차원에서 예산을 보조해주고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가 지원해주면서 현재는 고정독자 2000여명에 상근 4명이 신문을 내고 있다.

카레이스키 돔 전경

김 콘스탄틴 대표(왼쪽)와 남경자 부대표(오른쪽)


 가장 큰 고민은 고려인 젊은 세대가 한글을 잊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독자가 줄다 보니 전체 20면 가운데 4면만 한글로 제작하고 16면은 러시아어로 제작한다. 김 대표 역시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안 돼 남 부대표가 통역을 해야 했을 정도다. 한글판 제작 역시 남 부대표가 전담하고 있다.

남 부대표는 “그래도 최근 한국과 교류가 활발해진 덕분에 한글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는 게 다행”이라면서 “대학교에서 한국어과는 중국어과 다음으로 인기가 있다.”고 소개했다.

“카자흐스탄 사회지도층 중 고려인 적지 않다”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10만여명. 이 가운데 30%가량이 알마티에 거주한다. 남 부대표는 “학자나 전문가처럼 카자흐스탄 사회지도층으로 활약하는 고려인이 적지 않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예컨대 최유리 상원의장은 전 고려인협회장이었다. 강게오르기 협회 부회장은 카자흐스탄 역사교과서를 집필한 유명 역사학자다.

 700만명을 바라보는 전세계 재외동포들에게도 남북 분단은 고민거리다. 국내에선 카자흐스탄이 옛 소련의 일원이었다는 점 때문에 고려일보도 ‘친북’ 아니냐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강한 어조로 “고려인들에겐 남북이 갈라진 건 부모가 이혼한 것이나 다름없다. 부모가 이혼했다고 해서 한쪽만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고려일보 사무실 앞에는 북한에서 보낸 러시아어판 홍보책자와 한국에서 보낸 한글 홍보책자가 나란히 놓여 있다.

 내년이면 고려인 강제이주 74주년을 맞는다. 고려일보는 고려인 젊은이 수십명을 모아 내년 6월부터 8월까지 선조들이 강제이주당했던 여정을 되짚어 보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수천㎞를 자동차로 여행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다른 뒤 항공 또는 배편으로 한국에 입국, 서울에서 열리는 광복절 행사에 참가하겠다는 구상이다. 김 대표는 행사 준비 비용이 만만치 않다면서 한국에서 도움을 주기를 기대한다는 희망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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