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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시민의신문 기사

“조선 꽁무니만 좇는 동아가 불쌍해” (2004.4.30)

by betulo 2007.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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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꽁무니만 좇는 동아가 불쌍해”
동아투위 해직기자 조양진씨
2004/4/30
강국진 globalngo@ngotimes.net

지난 75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결성은 언론자유운동에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후 30년 당시 동아투위 위원 1백13명 가운데 10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대부분 현직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도 내년 당시를 회상하며 기념행사와 월례행사 등을 통해 우의를 다진다.

 

동아투위 사건으로 해직된 조양진씨는 “죽기 전에 우리의 투쟁이 정당한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복직이야 이제는 힘들지. 민주화보상법으로 명예회복은 됐다지만 해직자는 보상을 못받는다는 규정이 있더라구. 가장 안타까운 건 우리를 해직시켰던 동아일보가 우리한테 사과 한마디 안한다는 거야. 해직 이후 밥도 제대로 못먹고 거리를 헤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해직기자 대부분이 지금도 어렵게 살고 있단 말야.”

 

“못받은 퇴직금 반의 반이라도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나중는 돈 안받아도 좋으니까 제발 동아투위 정신으로 돌아가라고 후배기자들에게 여러번 충고하기도 했다”는 조씨는 “수십년간 얘기해도 쇠귀에 경읽기였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날마다 조선일보 꽁무니만 좇아다니니까 70년대 1등신문이었던 동아일보가 이제는 ‘동조중’도 아니고 ‘조중동’ 소리 듣는거 아니냐”고 꼬집으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70년에 동아일보에 입사한 조씨는 “동아투위 이전에는 별 고민없이 ‘부화뇌동’했던 사람”이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한 뒤 “동아투위가 내 삶을 바꿔놓은 셈”이라고 회상했다. “유신 이후 중앙정보부가 신문사 데스크 구실을 할 정도로 언론에 재갈을 물려놓았지. 근데 하루는 서울대 법대생들이 동아일보 앞에서 ‘동아야 죽었느냐’며 항의시위를 하더라구. 그 때 젊은 기자들이 많이 각성했지. 그때부터 중앙정보부와 싸워가면서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결의했던거야.”

 

그는 “독재정권이 세계 언론사에 전무후무한 광고탄압을 들고 나오니 사주가 죽을 맛이었을 것”이라며 “결국 1975년 3월 17일 새벽 4시에 신문사지국 직원들과 유단자 3-4백명을 동원해서 우리를 다 내쫓았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일부는 병원에 실려가고 나머지는 청진동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먹은 다음에 기자협회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만들었어.”

 

조씨는 한국 언론의 과제를 묻는 질문에 대뜸 “조중동이 사라져야 언론이 살고 한국이 산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조중동은 언론의 탈을 쓴 쓰레기”라며 “수구세력을 유지하는 동력인 조중동이 언론시장을 장악해 국민을 혼미하게 만든다”고 조중동을 강하게 비판했다. 조씨는 “조중동은 친일파 자손이 만드는 신문이고 군사독재에 영합하고도 사과 한 번 안하는 신문”이라며 “조중동은 언론 자유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해직 이후 몇 년간 월간경향에서 부장으로 일했던 조씨는 89년 8월호에 ‘8․15해방은 아직 멀었다’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고 이후 석연치 않은 이후로 월간경향이 폐간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지금 한나라당 의원 윤모씨가 당시 청와대 공보담당비서였어. 8월호 나오고 나서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났는데 ‘책 그렇게 만들어서 되겠느냐’고 공갈조로 말하더라구. 그 일이 있고 반년도 안돼 적자라는 이유로 폐간됐어. 내 생각엔 청와대에서 압력을 행사한 것 같아.”

 

조씨는 후배기자들에게 “사실보도에 충실할 것”을 충고하기도 했다. “어느 주간지에서 민경찬펀드 6백억 기사를 썼는데 그건 기사 요건이 안되는 거였어. 통장확인도 없이 어떻게 당사자 말만 듣고 기사를 쓸 수 있냔 말이지. 그런 기사 하나로 사회전체가 필요없는 혼란만 겪었잖아. 신념을 갖고 발로 뛰어서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 기사를 쓰는 게 진짜 기자 아니겠어.”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2004년 4월 30일 오전 6시 23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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